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광주·전라

[전북군산]세계해전사 최초로 화포가 사용된 진포대첩 (03. 07)

by 柔淡 2010. 3. 19.

군산 영화동의 한주옥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경암동의 폐철길을 찾아가는도중에 진포해양공원이라는 팻말이 보여

그쪽으로 차를 몰았다. 큰길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바닷가에 다양한 육해공군 장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생뚱맞게 왜 이런 군사장비들이 전시되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중에 그근원을 알고나니

군인출신이었던 내가 그런역사적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게 오히려 부끄러워졌다.

 

진포대첩 : 군산시청 홈피 발췌

  우왕 6년 8월 왜구들은 5백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오늘날의 금강 어구에 해당하는 진포구에 침입했다. 그들은 큰 밧줄로 배들을 서로

연결하여 묶어 놓고 군사를 나누어 이를 지키게 한 다음에, 대 부대를 거느리고 연안에 상륙하여 주변의 고을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왜구의 야만적인 약탈로 인하여 우리 백성들의 시체가 산과 들을 덮었으며, 약탈한 쌀을 배로 실어 나르면서 한 자 두께가 넘게 땅에

수북히 흘렸을 만큼 그 피해가 매우 컸다.

 

정부는 해도원사 나세와 심덕부, 그리고 최무선을 진포로 파견하여 전함 1백 척을 거느리고 왜구를 진압하게 하였다.

이 때 최무선은 자신이 만든 화포를 처음으로 사용하여 왜구의 배들을 불태워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硝石과 유황(硫黃), 그리고 목탄(木炭)을 혼합한 근대적인 폭발화약의 제조법은 이미 북송대부터 알려지기 시작하여 원대에 이르러서는

일본의 정벌 때에도 사용할 만큼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고려에 대해서는 이를 군사기밀이라 하여 철저하게 비밀로 하였다. 왜구를 격멸하기 위해서 화약의 제조가 절실하다고 생각한

최무선은 중국의 강남에서 온 상객 가운데 화약의 제조법을 터득한 사람을 자신의 집에 데려다 두고 의식을 제공하며 수십일 간에 걸쳐 화약

제조의 요령을 터득하였다.

그리하여 우왕 3년에 직접 조정에 건의하여 화통도감(火通都監)을 설치하게 하고, 여기에서 화약을 제조하면서 각종 화기를 제작하였다.

이 당시 그가 만든 화기로는, 대장군(大將軍)·이장군(二將軍)·삼장군(三將軍)·육화석포(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 )·

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질려포 ·철탄자(鐵彈子)·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주화(走火)·촉천화(觸天火) 등이 있었다.

이렇게 제작된 화기들은 진포 해전에서 사용되어 왜구를 격멸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정이오(鄭以吾)가 그의 저서 {화약고기(火藥庫記)}에서 우왕대의 진포해전과

남해의 전투에서 우리 군사가 왜구를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화통(火通)과 화포(火砲)를 이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싸움에서 화포를 맞은 왜선(倭船)은 거의 모두 불에 타서 연기가 온통 하늘을 뒤덮었으며, 불에 타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왜구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처럼 진포의 해전은 우리측의 승리로 끝났지만, 해안에 정박하여 있다가 우리 전함의 화포로 거의 모든 배를 잃은 왜적들은 사실상 퇴로를

차단 당한 형편이 되었기 때문에 육지 깊숙한 곳으로 달아나면서 닥치는 대로 잔악한 행위를 벌였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 때 왜구들은

포로로 잡은 우리측의 양민과 어린아이들을 대거 살륙하여 시체가 산처럼 쌓였으며, 여기에서 살아서 도망쳐 나온 사람은 겨우 33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왜구들은 심지어 2-3세 된 어린아이의 머리를 깎고 배를 갈라 쌀과 술과 함께 제물로 삼아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왜구들이 저지른 살인과 약탈은 바다에 인접하여 있는 삼도의 마을들을 폐허로 만들 정도로 잔인하고 처참한 것이었다. 왜적의 일부는 옥천과

영동 쪽으로 달아나 약탈 행위를 벌였는가 하면, 일부는 상주와 선산, 금산 쪽으로 달아났다. 특히 상주 쪽으로 달아난 왜군의 주력 부대는 다시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경산(星州)을 거쳐 함양의 동쪽에 있는 사구내역에 주둔하였다. 정부는 원수 박수경, 배언 등을 파견하여 이들을 공격

하게 하였으나 오히려 싸움에서 져 박수경과 배언을 비롯하여 아군 5백여명이 전사하였다. 승전에 고무된 왜구들은 함양을 노략질하고 다음 달인

9월에는 남원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들은 운봉현으로 물러나 인월역에서 두둔하면서 "장차 말을 금성(潭陽)에서 먹여 가지고

북상하겠다"고 기세를 부렸다.

 

황산대첩

이에 정부는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도도순찰사로, 변안열을 체찰사로 각각 임명하고, 왜구들에 대한 본격적인 토벌에 나섰다. 이들 지휘부는

병력을 거느리고 남원으로 달려 가 그곳에 있던 배극렴 등과 합류하여 운봉을 지나 황산의 서북쪽에서 왜구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마침내 그들을 섬멸하였다. 황산전투는 숫적으로 10배에 가까운 적들을 대상으로 하여 이들을 거의 전멸하고, 불과 70여명의 적들만이 살아남아

지리산 속으로 도망갈 정도로 완전한 승리였다.이 때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한 것이었는가는 당시 그곳 냇가에서 흐르는 물이 모두 붉게 물들어

일주일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싸움을 계기로 하여 왜구의 세력은 차츰 시들어갔으며, 한편 이성계 등 신흥 군부

세력은 확고한 세력 기반을 구축하게 되어 뒷날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건국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전주의 오목대와 이목대가 태조 이성계가 바로 이 황산대첩을 거두고 금의 환향하면서 자신의 4대조가 살던 전주에 들러 장차

풍패지향이 될것을 노래했다는 전설이 어린곳이다)

 

진포해전은 이제까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화기를 제조하여 이를 왜구의 토벌에 이용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전사상戰史上 큰 의의가 있었으며, 또한 이 싸움에서의 승리를 계기로 하여 왜구의 침입이 수그러지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전투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이곳 진포 지역에 대한 크고 작은 왜구의 침입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진포해전이 있고 난 뒤 2년째가 되는 우왕 8년 10월 왜선

50척이 진포에 침입하자, 해도원사 정지가 이를 공격하여 군산도(지금의 고군산)까지 추격한 끝에 4척을 포획하였으며, 우왕 14년 5월에는 다시

왜선 80척이 대거 진포에 들어와 근처의 마을들을 노략질하였다. 정부는 상호군 진여선를 전라양광도에 파견하였으나, 그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자, 그의 자제와 노예들 중에서 대신 갈 수 있는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보내 왜구를 막게 하였으며, 이를 피한 자들은 군법으로 엄단하고

재산을 몰수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왜구들은 전주에 침입하여 관청을 불살랐는가 하면, 김제와 만경, 인의현 등에도 침입

하였다. 이같은 왜구의 잦은 노략질은 공양왕대를 지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야 마침내 소멸되게 되었다.

 

진포는 장항과 군산 사이를 흐르는 금강하구가 서해와 만나는 지점에 있는 조그만 포구이다. 건너편은 충남 장항이다.

 

 지금은 이렇게 평화로운 어촌인데 600여년전 왜구의 침략으로 피바다가 됐다니....

  

 조선시대를 지나 다시 일본의 식미지가 되었을대도 군산은 그들의 중요한 전초기지중의 하나였다.

 

 

 

 

 

 멀리 금강하구둑이 보인다.

 

 

 

 

  

 

  경술국치 10주년, 다시 일본을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