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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고궁,사찰,기타)

화성문화제 - 화성행궁 (08. 10. 11)

by 柔淡 2008. 10. 14.

정조대왕 능행차 연시를 촬영하고 장안문을 출발 10분정도 걸어서 화성행궁으로 갔다.

그곳에서도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현륭원에 전배(展拜)하기 위하여 행행(幸行) 때에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평상시에는 부사(뒤에는 留守)가

집무하는 부아(府衙)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왕 13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부터 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친 원행(園行)을 정기적으로 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 1년(1801) 행궁 곁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는데, 그뒤

순조·헌종·고종 등 역대 왕들이 화성행궁을 찾아 이곳에 머물렀다.
따라서 이 행궁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수많은 행궁 중 그 규모나 능행면에서 단연 으뜸이 될 만큼 건축물의 규모 뿐만 아니라

성곽과 더불어 정치적·군사적 면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정조때 최대의 역사였던 화성 성역은 1차적으로 화산의 현륭원 호위와 함께 팔달산 정상 바로 아래 성내 중심부에 건립된 행궁을

둘러싸면서 이를 수호하는 것을 중요 목적으로 설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화성 행궁이 성곽과 더불어 단순한 건축조형물이 아니라, 개혁적인 계몽군주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강화정책의 상징물로서

정치적·군사적인 큰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화성행궁은 처음부터 별도의 독립된 건물로 일시에 건축된 것이 아니라 행궁과 수원부 신읍치의 관아건물을 확장·증측하는 가운데

조성되었다. 정조 13년 7월부터 현륭원 천봉을 앞두고 대대적인 구읍치의 관아와 민가의 철거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화성행궁은

팔달산 기슭 아래로 신읍치를 이치(移置)하기 시작한 지 2개월 뒤인 정조 13년 9월 말에는 벌써 신읍에 조성된 관아 건물은 행궁 27칸을

비롯하여 삼문(三門) 5칸, 좌변익랑(左邊翼廊) 9칸, 우변익랑(右邊翼廊) 6칸, 서변행각(西邊行閣) 5칸, 서상고(棲上庫) 10칸, 중문 5칸,

내아(內衙) 34칸, 중문 4처, 객사 20칸, 중문 2처, 향교 51칸, 중문 1처, 군수고 19.5칸, 공수(公須) 7칸, 관청 5칸, 창사(倉舍) 60칸,

각처 담장 278칸 등에 이르렀다.

한편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행궁과 관아 건물은 신축과 증축을 거듭하여 정조 14년 5월 초에는 득중정(得中亭) 9칸, 대문 1칸, 진남루(鎭南樓) 6칸,

좌익문 3칸, 좌우익랑 6칸, 남익랑 6칸, 북익랑 5칸, 강무당(講武堂) 16칸, 와호헌(臥護軒) 15.5칸, 대문 1칸, 익랑 8칸, 장용영전목고(壯勇營錢木庫) 1칸,

잡물고(雜物庫) 2칸, 미고(米庫) 5칸, 비장청(裨將廳) 15칸, 향청 19칸, 군향고대청(軍餉庫大廳) 5.5칸, 고사(庫舍) 42칸, 고마고대청(雇馬庫大廳) 4.5칸,

고사(庫舍) 6칸, 관청대청 .5칸, 고사 18칸, 어승마마구(御乘馬馬廐) 10칸, 군기대청(軍器大廳) 6칸, 군수고·미고 6칸, 군기총검고(軍器銃劍庫) 5칸,

명륜당(明倫堂) 10칸, 집사청(執事廳) 24.5칸, 관창 17칸, 방영군 관청(防營軍官廳) 12칸, 토포군관청(討捕軍官廳) 19.5칸, 별효사청(別驍士廳) 6칸,

작청(作廳) 28칸, 영선(營繕) 10칸, 교방(敎房) 6칸, 객사익랑(客舍翼廊) 4칸, 외삼문 3칸, 외담장 199칸 등 공해와 군영 건물이 새로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