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에는 강릉 안목항에 장모님을 모시고가서 맛있는 회를 먹고 돌아오니 11시가 되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하루종일 다녔으니 많이 피곤해서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금당계곡을 돌아보려 했으니 안개가 끼고 부슬비도 내린다.
금당계곡을 포기하고 잠을 더 자보려 했으니 잠은 안오고....
아침을 먹고 데이지와 오대산으로 향한다.
먼저 가장 멀리있는 상원사부터 가기로 하고 비포장도로 10KM정도를 달려 상원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하늘도 맑아오고 어제 내린비로 계곡에는 흙탕물이 흐르지만 숲이 맑고 싱그럽다.
상원사
나라 안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선원으로서도 널리 알려져, 일찍부터 월정사 산내 암자에 그치지 않는 명성을 누려 오고 있다.
특히 사람이 자주 다니는 도로에서 멀지 않은데도 깊은 산사의 숙연한 분위기가 매우 뛰어나, 참선수행으로써 본래의 참면목을 깨우치려는 눈 푸른
수행납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상원사는 신라 성덕왕 4년(705)에 신라의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왕자에 의해 오대산 중대에 창건되었는데, 처음 이름은 진여원(眞如院) 이었다.
자장율사가 개산한 뒤로 오대산이 불교 성지로서 그 이름을 빛내면서 마침내 오류성중(五類聖衆) 곧 다섯 부류의 성인들이 머무는 곳으로 신앙화되기 시작하던
즈음이다. 이 때의 창건 설화를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는 아우 효명과 더불어 저마다 일천 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 에 이르러 여러 날 놀다가 태화(太和) 원년(元年)에 형제가 함께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형 보천태자는 오대산 중대 남쪽 밑 진여원 터 아래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으며, 아우 효명은 북대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다. 두 사람은 함께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수행하였으며 오대에 나아가 공경하며 참배하던 중 오만의 보살을 친견한
뒤로, 날마다 이른 아침에 차를 달여 일만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 이 때, 신문왕의 후계를 두고 나라에서 분쟁이 일자 사람들이 오대산에 찾아와 왕위를 이을
것을 권하였는데 보천태자가 한사코 돌아가려 하지 않자 하는 수 없이 효명이 사람들의 뜻을 좇아 왕위에 올랐다. 그가 성덕왕(聖德王)이다.
왕이 된 효명태자는 오대산에서 수도하던 중에 문수보살이 여러 모습으로 몸을 나타내 보이던 곳에 진여원을 개창하니 이 곳이 지금의 상원사이다.
고려시대에는 상원사가 어떠한 중창의 발자취를 걸어왔는지 밝히는 자료는 없으나 이색(李穡)의 ' 오대 상원사 승당기(五臺上院寺僧堂記) ' 에는 고려말
'나옹스님의 제자라고 알려진 영로암(英露庵) 이라는 스님이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터만 남은 상원사를 중창하였다' 고 적혀있다.
고려말부터 일기 시작한 척불(斥佛) 정책은 조선시대에 들어 더욱 거세어져 불교는 극박한 박해를 받기에 이르렀다. 태종은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고
11종(宗)이던 불교 종파를 7종으로 통합하는 등 척불에 앞장섰으나 만년에는 상원사 사자암을 중건하고 자신의 원찰로 삼았다. 또 나아가서는 권근(權近) 에게
명하여 '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까지 그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불은(佛恩) 에 젖게 하라 ' 고 하였다.
이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불교에 귀의하여 그 잘못을 참회하기 위해 많은 불사를 행하였으며 나라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불서의
간행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세조는 오대산에서 두 번의 이적을 체험하였다. 지병을 고치려고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나서 병이 나았고,
상원사 참배중에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일화가 그것이다. 이렇듯 세조와 상원사는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1984년에 발견된 문수동자 복장에서는 세조의 딸 의숙공주가 문수동자상을 봉안한다는 발원문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근세에는 방한암 스님이
오대산으로 들어온 뒤로 상원사에서 이십칠 년 동안 두문불출하며 수도 정진하였으며 수련소를 개설하여 후학 양성에 진력하였다.
오늘날에도 전국에서 선남선녀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불교 성지로서 명성을 얻고 있다.
상원사 입구의 표지석
세조는 즉위 기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만년에는 단종의 어머니이며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에 시달려 아들 의경세자가
죽자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 등 패륜을 범하기도 하였다.
또한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나서부터 피부병에 걸렸다. 전신에 종기가 돋고 고름이 나는 등 잘 낫지도 않고 견디기가 무척 힘든 병이었다.
세조는 명의와 명약으로도 효험을 보지 못하자 오대산으로 발길을 돌려 부처님께 참회기도를 올려 낫기를 발원하였다.
세조가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어느 날, 오대천의 맑은 물이 너무 좋아 혼자 몸을 담가 목욕하고 있었다. 그 때 지나가던 한 동승에게 등을 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동승이 등을 밀자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졌다.
목욕을 마친 세조는 동승에게 "그대는 어디 가든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니 동승을 미소를 지으며 "대왕은 어디 가든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하지 마십시오"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세조가 놀라 주위를 살피니 동승은 간 곳 없고 어느새 자기 몸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은 것을 알았다.
이렇듯 문수보살의 가피로 불치병을 치료한 세조는 크게 감격하여 회공을 불러 그 때 만난 동자의 모습을 그리고, 목각상을 조각하게 하니 이 목각상이 바로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이다.
지금은 문수동자의 화상은 없어졌으나 목각상은 상원사 법당에 모셔져 있다.
세조가 당시 친견한 문수보살의 모습을 그리려고 많은 화공을 불렀으나 잘 그리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누더기를 걸친 노스님이 와서 자신이 그려 보겠다고 했다. 세조가 이러저러한 모습을 설명해 주자 노스님은 자신이 알아 그리겠다고 설명도
듣지 않았다.
이윽고 그려온 문수동자승의 모습이 너무나도 똑같아 세조는 놀라고 기쁜 마음에 "스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하자 노스님은 "나는 영산회상에서 왔습니다"하고는
곧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결국 세조는 문수보살을 두 번이나 친견한 것이다.
현존하는 한국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우며 청아한 소리 또한 이루 비길데 없는 이종은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조성되었다.
조선 태종 때 불교가 박해를 받을 때 안동으로 옮겨졌다가 조선 예종 원년(1469)에 상원사에 다시 옮겨진 것으로, 한국 종 고유의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는
대표적 범종이다.
음통(音筒)이 있는 용뉴(龍뉴) 아래 종신은 약간 길쭉하게 배를 불리다 끝에서 안으로 살짝 오므라든 형태가 이상적인 비례감과 안정감 있는 조형미를 이루었고,
풍부한 양감과 함께 세부적인 묘사 수법이 사실적이다.
종신(鐘身)에 있는 상대, 하대, 4유곽(乳廓)의 문양은 당초문을 바탕으로 2 ~ 4인의 작은 주악비천상(奏樂飛天像)이 있는 반원권문(半圓卷紋)이 새겨졌고,
종복(鐘復)에 비천상과 교대로 있는 당좌(撞座)는 8판연화문(八瓣蓮花紋)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비천상은 경쾌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구름 위에서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는 모습이나 또 공후(공후)와 생(笙)을 연주하는 손의 표현이 매우 섬세하여
생동감이 넘친다. 볼록한 두 뺨, 유연한 신체에 걸친 천의 등은 8세기 전반의 이상적인 사실풍의 불교 조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정상에는 약동하는 용이 있고 그옆에는 연꽃이 조각된 음통이 붙어 있다.
용뉴 좌우에는 70자에 달하는 명문이 해서채로 음각되었는데 첫머리에 '개원 십삼년 을축 3월 8일 종성기지(開元 十三年 乙丑 三月 八日 鍾成記之)'라고
되어 있어,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원사 종에 보이는 음통, 종 끝부분이 안으로 오므라든 종신형(鐘身形), 상대와 하대 및 4유곽 등의 주조적인 특징은 한국 종의 대표적인 유형이 되어
이후의 모든 종이 계승되었다.
국보 제36호.
이 종의 소재 사명(寺名)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조선 초기에는 경북 안동 본부(本府) 문루(門樓)에 걸려 있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종은 안동 근처의 어느 사찰에 봉안되어 있다가 태종이 불교를 박해할 때 안동 문루로 옮겨졌다고 한다.
세조 때 상원사에 봉안할 종을 팔도에서 찾고 있던 중 안동에 있던 이 종이 선정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세조가 승하한 직후인 예종 원년(1469)에 상원사에 도달했다고 한다.
종을 안동에서부터 상원사로 옮겨오던 중에 3,379근(斤)이나 되는 큰 종이 장차 죽령(竹嶺)을 넘으려 하는데 노상에서 움직이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종꼭지를 하나
떼어서 안동으로 보내니 비로소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전설을 입증하듯 네 곳의 유곽 안에 1곽(廓)의 종유가 하나 없다.
이러한 고사는 대종 운반의 어려움을 나타내고 있지만 민속신앙의 한 형태를 보여주기도 한다.
영산전은 선원 뒤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1946년 화재가 났을 때 유일하게 불길을 모면한 덕분에 오대산 안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
안에는 석가 삼존상과 십육 나한상을 봉안하였는데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어서 영산전이라 한다.
조선 세조가 희사한 39함(函)의 고려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다.
이 장경은 본래 다섯 질을 인행(印行)하여 삼보사찰과 설악산 오세암 그리고 상원사에 봉안한 것이데, 오세암의 장경은 소실되었고 통보사, 해인사, 송광사의
삼보사찰과 이 곳에만 보존되어 있다.
이 석탑은 본래 지금의 자리에 있던 것이 아니라 계곡에 있던 폐탑을 옮겨 놓은 것이라고도 하고 영산전 옆에서 출토됐다고도 전한다. 단층 기단 위에 세운
5층석탑으로 추정되나 화강암석재가 많이 없어져 자세히 알 수 없다.
1개의 판석으로 이루어진 하대석은 20엽(葉)의 복련이 조각되어 있고 갑석에도 복련이 조각되어 있다.
탑신부는 삼존불을 비롯한 불보살을 가득 새겨 매우 호화로우며 옥개석은 1층만 남아 있는데 거의 파손되었고 층급은 나타내지 않았다.
조성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학계에서는 고려 후기 또는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혼자 다니면 적멸보궁까지 갔다 왔을텐데 표지석만 찍었다.
어제는 세조에게 억울하게 폐위되어 한많은 생을 마감했던 단종이 살았던 영월의 청령포를 보고
오늘은 그 단종을 왕위에서 쫒아낸뒤 말년에 온갖 괴로움에 시달렸던 세조가 신병치료차 찾아왔던 상원사를 보니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다.
21세기 문명천지에도 비슷한 일이.....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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