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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부산·울산·대구·경상

우리나라의 가장 아름다운 서원건축, 안동 병산서원 (09. 11. 29)

by 柔淡 2009. 12. 8.

안동한지공장에서 나와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그 이름도 유명한 병산서원, 서원건축의 백미라 알려진 곳이다.

낙동강을 좌측에 끼고 병산서원으로 가는길은 아직 비포장 도로이다.

옛 선비들이 학문을 닦고 심신을 수련하던곳에 굳이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깔아 씽씽 달려가서 볼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낙동강의 풍경을 즐기며 천천히 걷는맛이 더 좋을것 같다.

 

병산서원소개 (병산서원 홈페이지 발췌)http://hahoe2.andong.com/

       병산서원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교적 건축물로서, 류성룡(柳成龍)과 그의 셋째아들

      류진(柳袗)을 배향한 서원입니다.

 류성룡(柳成龍)선생이 살아계실 때 제자들을 가르치던곳. 류성룡 선생의 문집을 비롯해

      각종 문헌 1000여종 3000여책이 소장 되어 있습니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선생의 제자들과 유림이 뜻을 같이 하여, 서원 안에 사당(존덕사)을

      세우고 위패를 모셔서 선생의 학덕을 이어받고  추모하며 향사(제사)를 올리던 서원입니다.

      이 제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병산서원이 설립된 유래

 

 고려 때, 안동의 풍산현에 풍악서당이 있어 지방 유림의 자제들이 모여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고려말, 공민왕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왕의 행차가 풍산을 지날무렵, 그곳 풍악서당에서

      유생들이 난리 중에서도 학문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많은 서책과 사패지(賜牌地-호패와 땅)을 주어 유생들을 더욱 학문에 열중하도록 격려 하

      였습니다.

 

 이후, 약 200년이 지나면서 서당 가까이 집들이 많이 들어서고 길이 생기며, 차츰 시끄러워 지면

      서 유림들이 모여 서당을 옮길 것을 물색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마침 서애 류성룡선생께서 부친상을 당하시고 하회에 와 계실 때였기에 유림들은 그 일을

      선생에게 문의하였다고 합니다.

 

 서애선생께선 그 문의를 듣고 병산이 가장 적당할 것이라고 권하게 되었고 유림들은 선생의 뜻에

      따라 서당을 병산으로 옮기고 "병산서당"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습니다. (1572)

 

 임진왜란으로 불에탄 서당을 다시 중건하였고(1607), 사당 '존덕사'를 건립하면서 서원이 되었습

      니다.(1610)

 

 그후 병산서원은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고,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고종5년) 흥

      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사라지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병산서원과 자연

 빼어난 자연경관이 병풍을 둘러친 듯하여 '병산'이라 불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화산을 등지고 앞으로 낙동강이 백사장과 함께 굽이쳐 흘러가고 그 투명한 푸름은 소나무의 짙푸름과

      서로 다투는 듯  조화롭습니다.

 

 만대루에서는 주변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입교당에서는 자연과 조화된 병산서원의 미(美)를

      더욱 느낄 수 있습니다.

 

서원의 구조

 

  

           <병산서원 전체 구조도>

 

 병산서원 입구

 례문

     서원의 정문. 지금은 주사의 왼편에 있는 문을 통해 서원을  출입할 수 있습니다.

    (복례문에는 '내가 이곳에 들어가기전 예를 지킨다' 라는 뜻이 스며 있다고 합니다. 서원지킴이님의 말씀)

 

 오래된 두그루의 매화나무가 서있다. 홍매와 청매

 도산서원에도 매화나무가 심겨져 있었는데 옛 선비들은 역시 매화나무를 사랑하셨나보다.

 

 입교당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강학당(講學堂), 한마디로 수업을 받던 '교실' 입니다.

     입교당은 중앙은 강학당, 동쪽으로 명성제, 서쪽으로 경의제로 모두 세칸을 나누어져 있습니다.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 라는 뜻의 입교당은 서원의 중앙에 위치하고, 병산서원의 중심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동재와 서재

   입교당과 만대루 사이의 마당에 위치.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워져 있는 이 건물은 당시 학문에 열중하던 유생들의 기숙사였습니다.

 

 장판각

     서원에서 펴낸 책을 인쇄할 때 쓰이는 목판을 보관하던 곳입니다.

 만대루

     유생들의 행사때의 한자리에 모였던 대강당.  병산서원에서 가장 알려진 건물로서 건축과 조형미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 건물입니다.  이곳 만대루에서 병산을 바라보며 시를 읊기도, 때론 가야금이 연주되기도 하였겠지요..

 

만대루(晩對樓)의 만대는 두보의 시 <백제성루>에 나오는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니 (翠屛宜晩對)에서 따온  말.

마당을 사이에두고 입교당(강당)과 마주보고, 유생들의 행사때 한자리에 모였던 대강당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낙동강을 향해 열려있는 만대루는 서원 주변의 경치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입니다

7칸의 단순한 이 건물은 병산서원의 집합적 질서의 묘미가 집약되어져 있습니다.

 

 

 마치 병산서원의 정형미를 앞서서 증명이라도 하듯 서원의 정면에 서면 만대루가 넓게 솟아 있습니다

만대루의 기둥들은 그 다양한 선의 연속에 의해 주변경관을 수직적으로 분절시기고 있습니다. (한폭 한폭의 그림이 담긴

캔바 스들을 보듯..)

 

 

 

 

 

입교당에서 만대루를 바라보게 되면 외부의 자연경관

     을 수평적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존덕사

     서원 내의 가장 윗부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서애 류성룡선생과 셋째아들인 류진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입니다.

 

 전사청

     위패가 모셔진 존덕사의 오른편에 위치, 존덕사에서 쓰일 제물을 준비하였습니다.

 배롱나무가 여러그루 있는데 수령이 380여년이라니 대단하다.

남도 담양의 소쇄원, 식영정, 명옥헌, 환벽당 등에도 배롱나무가 많이 심겨져 있는데 배롱나무도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던 나무다.

 좋은 사진을 얻기 위해서라면 자세가 문제가 되겠는가?

 복례문을 안쪽에서 바라봤다.

 소나무의 절개가 푸르르다.

 주사

     주사는 병산서원 '지킴이'의 집입니다. 서원의 맨 오른편에 위치. 지킴이 '류시석'님께서 항상 서원의 크고 작은 관리에

     노력을 하고 계십니다.  

 

 

 주사내부

 

 달팽이 모양을 닮은 '머슴뒷간'은 '통시'라고도 불리워 졌습니다.

 

풍수지리로 본 병산서원

 

병산서원은 앞의 병산(안산)이 너무 높고 급하여 강물은 빨리 흐르고,  땅의 기운이 쌓일 틈이 없이 계속 밀려내려가므로

     이런 터에서는 재물이 쌓일 틈이 없어 살림집의 입지로는 부적합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빨리 공부를 마치고 사회에 진출해야하는 교육시설로는 안성 맞춤인 터가 되는것이지요. 인적이 드물어 학문수양에

     방해가  없으며 뛰어난 경관을 앞에 하여 꽉짜인 서원의 규율과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수 있는 숨구멍이 트여있는

     그런 곳이기에 서원의 터로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