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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 132호 징비록의 산실, 옥연정사 (09. 11. 29)

by 柔淡 2009. 12. 9.

병산서원에서 나와 다음으로 간곳은 하회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부용대인데 부용대에 오르는길은 두가지가 있다.

화천서원 옆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화천서원 뒤쪽 능선을 따라 오르는 방법과 화천서원 앞을 지나

옥연정사 마당을 통과해서 급경사의 산길을 따라 오르는 방법이다.

또 하나는 하회마을에서 나룻배를 타고 옥연정사로 와서 오르는 방법이다.

조금 힘은 들지만 옥연정사 앞마당을 통과해서 오르는 방법이 풍광이 훨씬 좋다.

 

부용대에 오르기전, 먼저 옥연정사에 대해서 알아보자. 옥연정사 홈페이지 참조http://www.hahoehouse.co.kr/

 

대한민국 중요민속자료 88호. 국보 132호 징비록의 산실

玉淵精舍(옥연정사)는 서애 류성룡 선생이 거처하던 가옥이다. 玉淵精舍(옥연정사)는 대가족의 살림과 사당이 있는

종택(宗宅)과는 다른 서애선생만의 학문과 만남의 독립 공간이라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스스로 외로움을 즐길 수 있는  곳이랄까?
배를 타고 오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는 절벽 끝에 집을 지었다.
玉淵精舍(옥연정사)는 임진왜란을 어렵게 치룬 그의 삶과 모습, 생각과 인생, 분위기가 배어 있는 곳이다.
류성룡 선생은 탄홍스님의 도움을 받아 옥연정사를 마련한 다음 이 집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옥연서당기」로 남겼다.

그는 「옥연서당기」에 “중년에 망령되게도 벼슬길에 나아가 명예와 이욕을 다투는 마당에서 골몰하기를 20년이 되었다.

발을 들고 손을 놀릴 때마다 부딧칠 뿐이었으니, 당시에 크게 답답하고 슬퍼하면서
이곳의 무성한 숲, 우거진 덤불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라고 적고 있다.
또 스스로를 “고라니의 성품은 산야에 알맞지 성시(城市)에 맞는 동물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임진왜란과, 권위적인 왕조, 권력싸움에서 심한 시달림을 격은 한 학자의 모습이 진하게 느껴진다.
<옥연서당기 참고>

玉淵精舍(옥연정사)는 1576(선조9년) 집 짓기를 시작한지 10년만인 1586년 완공된다.
서애선생의 나이 45세 때이다. 집을 완공한 4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가난하여 집 지을 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을 때
탄홍(誕弘)이란 스님이 그 뜻을 알고 건축을 맡고 재력을 부담하겠다고 자원하여 완공되었다.  
1605년(선조38년) 낙동강 대홍수로 하회의 살림집 삼칸초옥을 잃고 이곳에 은거하며 임진난을 회고하여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옥연정사 입구 

 서애 유성룡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 자는 이견, 호는 서애. 의성 사촌출생으로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입암 류중영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사 송은 김광수의 딸이다.

이황의 문인으로 김성일과 동문수학했고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1564년 생원.진사가 되고 다음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뒤 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1580년 부제학에 올랐고 대사간.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으로 승진하고 왕명으로 <황화집서>를 찬진했다. 다시 부제학이 돼 <비변오책>을 지어 올렸으며 그해 함경도관찰사에 특제됐지만 어머니의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어 대사성에 임명됐지만 역시 사양하다가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됐다. 다음해 예조판서로 동지경연춘추관사.제학을 겸했고 왕명으로 <정충록발>을 지었다.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있게 되자 여러차례 벼슬을 사직했지만 왕이 허락하지 않자 소를 올려 자핵했다.

1590년 우의정으로 승진 광국공신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이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관련돼 죽게 된 최영경을 구제하려는 소를 초안했지만 올리지 못했다. 다음해 우의정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으로 승진하여 역시 이조판서를 겸했고 이해 건저문제로 서인 정철의 처벌이 논의될 때 동인 중의 온건파인 남인에 속해 같은 동인의 강경파인 북인의 이산해와 대립했다.

왜란이 있을 것을 대비해 권율과 이순신을 각각 의주목사와 전라도좌수사에 천거했고 경상우병사 조대곤을 이일로 교체할 것을 요청하는 한편 진관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청했다. 1592년 일본 사신이 우리 경내에 이르자, 선이사를 보랠 것을 청하였지만 허락하지 않아 일본사신은 그대로 돌아갔다. 그해 4월 판윤 신립과 군사에 관해 논의하며 일본의 침입에 따른 대책을 강구했다.

 4월 13일 일본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군무를 총활했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됐다.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 그뒤 충정.경상.전라 삼도도체찰사가 돼 파주까지 진격했다. 그 뒤 이여송이 일본과 화의하려 하자 그에게 글을 보내 화의를 논하는 것은 나쁜 계획임을 역설했다. 또 군대양성과 절강기계를 분떠 화포등 각종 무기의 제조,성곽의 수축을 건의해 군비확충에 노력했고 소금을 만들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요청했다. 10월 선조를 호위하고 서울에 돌아와 훈련도감을 설치할 것을 요청해 설립했다. 명나라와 일본과의 화의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군비보완을 위해 계속 노력했다.

1598년 명나라 경략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주화오국主和誤國)으로 관작을 삭탈당했다가 1600년에 복관됐지만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했다.

도학,문장,덕행,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묘지는 안동시 풍산읍 수동 뒷산에 있다. 안동의 병산서원 빙계서원 남계서원 삼강서원 등에 제향됐다.

저서로는 <서애집>,<징비록>,<운암잡기> 등이 있고 편저로는 <황화집>,<문산집>,<포은집>,<퇴계집>,<퇴계선생연보>등이 있다. 그런데 그의 저서에 대해 문인 정경세가 <서애행장>에서 “평생지은 시문이 임진병화 때 없어졌으며 이제 문집 10권과 <영모록><징비록>등이 집에 보관돼 있다”고 한 것을 보면 대부분이 없어졌음을 알 수 잇다. 국보인 <징비록>과 <서애집>은 임진왜란 연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다. 시호는 문충이다.

 

 대문을 지나면 옥연정사를 관리하는 김상철씨 내외와 아이들이 살고 있는 살림집이 나오고.

(김상철씨 내외는 원래 경북 일월산 아래 영양에 살다가 이곳에 와서 옥연정사를 관리하며 고택체험을 주관하고 계시고

얼마전 인간극장에 출연하여 그 진솔한 삶을 보여준 적도 있다.

나와는 야생화 카페 "들꽃풍경"회원으로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인데 이날은 자리에 안게셔서 만나지 못했다.)  

 

 다시 중문으로 들어가면 원락재와 세심제가 나온다.

원락재와 세심재는 고택체험을 하는 장소로 개방되어 있어 사전 에약을 하면 하룻밤 머무를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위의 홈페이지 링크를 참조하시라.

 

원락재

친구의 내방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원락재(遠樂齋)라 하였는데, 이 명칭은 논어(論語)중 '이른바 먼 곳으로부터 벗이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有朋이 自遠方來하니 不亦樂乎(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아라는 뜻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2칸 마루 애오헌은

도연명의 시에 '吾亦愛吾廬(오역애오려),나 또한 내 오두막집을 사랑하노라' 한 시어에서 따 온 것이다.

  

서애선생께서 이 방에 기거를 하시며 징비록을 서술하셨다.

징비록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서 도체찰사를 겸임하였던 서애(西厓)는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여기 옥연정사에서 기록해 간다. 임진란의 쓰라린

체험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러한 수난을 겪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한다는 민족적 숙원에서 책명을「징비록(懲毖錄)」으로 하였다.

 

1. 가장 종합적인 임진왜란 기록

  -1592년, 조선 선조 25년 4월 13일 바다를 뒤덮을 듯 수많은 왜적의 배가 부산 앞바다로 몰려온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꼽히는 임진왜란의 시작이다. 그날의 일을 『조선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적의 배가 바다를 덮으며 몰려왔다. 부산 첨사 정발은 그때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는데, 조공하러 오는 일본 배라고만

생각하고 대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진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적은 이미 성에 올랐고, 정발은 혼란 중에 죽었다. 다을 날

동래부가 함락되고 동래 부사 송상현이 죽었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은 7년이나 계속되며 우리나라를 폐허나 다름없게 짓밟아 놓았다. 위의 기록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듯이 우리나라

군대는 밀려드는 왜적앞에 힘없이 무너져 갔다.왜적은 별 달리 싸움다운 싸움도 하지 않고 경상도를 지나 충청도, 경기도로 밀고 올라와

불과 두 달 정도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평양까지 차지했다. 그동안 각 지방을 지키던 우리 관리들은 소문만 듣고도 허둥지둥 달아나고

군사들도 제 한몸 지키느라 재대로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임금은 서울을 버리고 개성, 평양을 지나 북쪽 땅 끝 의주까지 피난을 가고 임금과 갈라져 함경도 쪽으로 피난을 갔던 두 왕자는 적의 포로가

되었다. 백성들은 왜적의 총칼에 무참히 짓밟히고 가족이 서로 잡아먹을 정도로 굶주림에 시달렸으며 더러는 왜적의 협박에 굴복하여 혹은

자발적으로 왜적의 길잡이가 되거나 첩자가 되긱도 했다.

 

『징비록』은 바로 그 임진왜란을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데로 서술한 전쟁기록이다.
하나의 사건이라도 누가 어떤 위치에서 보고 어떤 관점에서 썼느냐에 따라 그 기록의 내용과 가치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징비록』의 지은이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고위 관직에 있었고, 전쟁중에는 최고 관직인 영의정으로서 또 전시

총 사령관격인 도체찰사로서 전쟁 수행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때로는 조정의 높은 관리로서 장수 임명에 관여하고 때로는 전쟁터를

누비면서 전략을 세우고 때로는 명나라 장수의 접대를 맡아 명나라 군대와 우리 군대의 작전 계획을 의논하는 등 전쟁과 관련된 거의 모든 정책

결정에 직접 참여했다.
그만큼 전쟁을 누구보다 대국적이고 종합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징비록』이 임진왜란을 기록한 국내외 문헌 중 가장

중요한 자료로 꼽히는 까닭이다.

 

2. 부끄러움과 반성의 기록

류성룡은 퇴계 이황 선생의 제자이다. 선생이 그를 처음 보고 “이 사람은 하늘이 낸 사람이다.” 라고 감탄했을 정도로 류성룡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명석했다. 학문적으로도 뛰어났지만 정치가로서의 자질이 한 수 위였던 듯하다. 그는 여러 사람이 기대했던 대로 과거에 급제한 뒤 승승장구 중요한

관직들을 두루 거치고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의 위기 앞에 온 몸으로 맞섰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기 한 달 전에 정적의 모함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경상도 하회로 돌아간다. 나중에 다시 관직이 복직되고 임금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불우한 만년을 보낸다.

『징비록』은 이 시기에 지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만년의 쓸쓸함을 달래기 위해서 이 책을 썼거나 혹은 모함당한 분을 품고 쓴 것은 아니다.

저자 서문에 보이듯이 『징비록』은 “나 같이 못난 사람이 난리가 나고 국정의 질서가 무너진 가운데 국가의 중책을 맡아 위태로운 판국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넘어지는 형세를 붙잡지 못했다.” 는 부끄러움과 “초야(草野)에서나마 못내 국가에 충성을 바치려는 나의 뜻을 내보이고, 또 못난 신하로서

나라를 위해 아무 공도 이루지 못한 나의 죄를 드러내려는” 반성의 기록이다. 그래서 책 제목도 “지난 전쟁을 돌아보며 반성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미리 조심하고 대비하려 한다” 는 뜻에서 『징비록』이라고 붙인 것이다.

『징비록』은 본래 임진왜란이 끝난 뒤 위에 말한 것과 같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집필한 회고록 형태의 기록 2권, 전쟁 중에 임금에게 올린 보고,

건의서, 관계기관이나 책임자들에게 보낸 지시, 전달문 등의 공문서 모음인 근포집, 진사록, 군문등록, 14권과 11항목의 녹후잡기로 이루어졌다.

서애 류성룡 선생이 쓴 친필 『징비록』은 경상북도 안동 풍천면에 있는 서애의 종손 집에 보관되어 내려왔고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전하는 『징비록』으로는 초고본인 『원본 징비록』이 있고, 목판으로 간행된 책으로 2권 본과 16권 본이 있다. 2권 본은 『징비록 권 1, 2』와

『녹후잡기』로 구성되어 있고, 16권 본에는 앞에 설명한 대로 2권 본에 『근포집』, 『전사록』, 『군문등록』이 함께 묶여있다.

 

회고록 형태의 『징비록 권 1, 2』에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 예사롭지 않았던 일본사신들의 언행을 시작으로 전쟁 초반 각 성과 진이 차례로 무너져

가는 상황, 임금의 피난 실상, 조정 신하들의 행태, 여러 장수의 능력, 각지의 의병활동, 백성의 참상, 명나라와 관계, 명나라가 구원병을 파견하면서

부터 시작된 일본과의 강화과정, 그리고 이순신의 전사까지 67개 항목이 대채로 시간 순서에 따라 기록되어 있다. 『녹후잡기』를 포함한 모두 78개

항목의 사실은 대부분 성공보다는 실패, 영광보다는 치욕, 밝은 면 보다는 어두운 면, 그리고 승인보다는 비판쪽에 치우쳐 있다.

 

그러면서도 지은이는 최대한 중립적 입장에서 담담하게 사실 만을 기록하고 있다. 옳다 그르다 하는 가치 판단은 물론이고 굴욕감, 안타까움, 분노같은

인간적인 감정도 최대한 억제하고 있다. 그런데도 모든 상황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은 지은이의 뛰어난 문장력 덕분일 것이다.

한문으로 된 『징비록 1.2』와 『녹후잡기』의 원문은 모두 합쳐 글자 수가 4만자 남짓이다. 7년의 기록치고는 몹시 짧다고 하겠다. 하지만 내용은

알차고 풍부하다. 그 짧은 글 속에 사건의 전후 사정을 핵심만 짚어 분명하고 간결하게 표현하고 그러면서도 문장은 유창하다. 이 점에서 『징비록』은

사료로서의 가치에다 문학적 가치를 더하게 된다.

 

참혹했던 전쟁도 끝났고, 영욕이 교차한 관직에서도 진즉에 떠났다. 쓸쓸하기도 했으려니와 한편으로 홀가분하기도 했을까? 죽음이 멀지 않은 늙은 몸

으로서 지난 전쟁을 돌아보며 나라를 생각하는 간절한 심정으로 담담히 써내려간 이 기록은 400년 세월을 넘어 지금의 우리에게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자칫 방심하면 언제 또다시 발생할지 모르는 국가적 재앙에 철저히 대비할 것을 당부했던 그가 고르고 골라 책 제목으로 선택한

두 글자가 ‘징(懲)’ 과 ‘비(毖)’였다.

 

글 / 징비록 역자 이동환님의 글에서 발췌 정리

 세심재

서당채의 이름이 세심재(洗心齋)이다.
주역계사편 중 의혹종사어사 이서기만일이(意或從事於斯 以庶幾萬一爾) ; 여기에 마음을 두어 만에 하나라도 이루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마루 감록헌은 왕희지의 '우러러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아래론 푸른물 구비 바라보네'라는 시어에서 따온 것이다.

감록헌 마루를 가운데로 두고  좌우 방 1칸이 있으며 서애선생께서 서당으로 쓰신 곳이다.

 

 

 

 

 옥연정사에서 부용대롤 가기위해 간죽문이라는 작은 문을 나서면 낙동강과 하회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주차장에서 옥연정사로 가기위해서는 화천서원을 지나야 하고

 

 

 내려올때도 화천서원을 지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