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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강원

[강원강릉]조선최고의 학자 율곡이이와 어머니 신사임당을 기리는 오죽헌 2

by 柔淡 2010. 4. 30.

1편에서 어떻게 오죽헌에서 율곡이 태어났는지 알아보았는데 이번에는 율곡이 어떤분인지 연구해보자.

 

이이(李珥){2}에 대하여
1536년(중종 31)∼1584년(선조 17). 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강릉 출생. 아버지는 증좌찬성 원수(元秀)이며,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이다.
1. 가계와 수학
출생하던 날 밤 어머니 신사임당의 꿈에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들어와 서렸다고 하여 아명을 현룡(見龍)이라 하였으며, 산실(産室)을
몽룡실(夢龍室)이라 하여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8세 때에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시를 지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웠고, 1548년(명종 3) 13세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세 때에 어머니가 죽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례하고 3년간 시묘(侍墓)하였다.

19세에 성혼(成渾)과 도의(道義)의 교분을 맺었다.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다음해 20세에 하산하여 다시 유학에 전심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다.
23세가 되던 봄에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고, 겨울에 별시에서 〈천도책 天道策〉을 지어 장원하였다.
전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6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었다.
2. 관직과 저술
29세에 호조좌랑에 처음 임명되고 예조좌랑·이조좌랑 등을 역임, 33세(1568)에 천추사(千秋使)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부교리춘추기사관을 겸임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해에 성혼과 ‘지선여중(至善與中)’ 및 ‘안자격치성정지설(顔子格致誠正之說)’을 논하였다.
34세에 〈동호문답 東湖問答〉을 지어올렸다.
37세에 율곡리에서 성혼과 이기(理氣)·사단칠정(四端七情)·인심도심(人心道心) 등을 논하였고, 39세(1574)에 우부승지에 임명되고 재해로
인하여 〈만언봉사 萬言封事〉를 올렸으며, 40세 때 《성학집요 聖學輯要》를 제진하였다.
42세에 《격몽요결 擊蒙要訣》을 지었고, 45세에 《기자실기 箕子實記》를 편찬하였다.
47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어명으로 〈인심도심설 人心道心說〉을 지었다. 이해에 〈김시습전 金時習傳〉과 《학교모범 學校模範》
지었으며, 48세에 〈시무육조 時務六條〉를 계진하고 십만양병을 주청하였다.
49세에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죽었으며 파주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의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3. 사화와 사회경제
1545년 을사사화가 발생하여 수많은 사류(士類)가 죽고 유배되었다. 사림은 출사(出仕)할 수 없었으며 물러서서 학문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565년(명종 20) 문정대비(文正大妃)의 죽음과 20년간 정사를 전횡하던 권신 윤원형(尹元衡)의 방축(放逐)·사망으로 나라 안의 정세는
일변하고 을사사화 이후의 피죄인(被罪人)은 소방(疏放)되었다.
이때는 이이가 30세로서 출사 1년째 되는 해였다. 이때부터 사림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기 시작하였다.
1566년에는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사액하였으며, 1567년에는 이황이 상경하였다. 그해 6월에는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였으며, 8월에는
을사사화 이후 피죄되었던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 등을 서용(敍用)하였다.
선조즉위 다음해인 1568년에는 조광조(趙光祖)에게 영의정을 추서, 이황이 일시에 대제학에 취임하고 남곤(南袞)의 관작삭탈, 이황
《성학십도 聖學十圖》 제진, 1569년(선조 2)에는 이이의 〈동호문답〉 제진, 그리고 1570년에는 유권(柳灌)·유인숙(柳仁淑)의 역명신원(逆名伸寃)
등 새로운 국면이 전개됨과 아울러 사림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이렇듯 상황이 변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구습이나 폐풍은 일시에 시정될 수 없었고, 근본적인 개혁없이 유림의 활동은 특별한
설시(設施)를 볼 수 없었다.
더구나 1575년부터는 동서의 분당으로 인하여 사림은 분열되고 무위한 정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연산군 이래의 폐법은 고쳐지지 않은 채 국가의
기강은 무너지고 민생의 곤고는 극도에 달하였으며, 군사적으로도 무력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4. 성리사상
1565년부터 1592년(선조 26)까지의 약 30년간은 국정을 쇄신하여 민생과 국력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며, 이이와 같은 인물이 조정에
나와 있었던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이는 16세기 후반의 조선사회를 ‘중쇠기(中衰期)’로 판단하여 일대 경장(更張)이 요구되는 시대라 하였다. 경장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것이
가능하다 함에 대하여는 이미 조광조도 강조한 바 있거니와, 이이의 시대에 있어서는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었다.
이이는 〈만언봉사〉에서 “시의(時宜)라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變通)하여 법을 만들어 백성을 구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조선의 역사에 있어서도 “우리 태조가 창업하였고, 세종이 수성(守成)하여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비로소 제정하였으며, 세조가 그 일을
계승하여 《경국대전》을 제정하였으니, 이것은 다 ‘인시이제의(因時而制宜)’한 것이요, 조종(祖宗)의 법도를 변란(變亂)함이 아니었다.”라 하였다.
그러므로 시대의 변천에 따라 법을 고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하였다.
이이에게 있어서 성리학은 단순한 사변적 관상철학(觀想哲學)이 아니었다. 성리학의 이론을 전개하는 이이에 있어서 항상 강조되는 것은 시세(時勢)를
알아서 옳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니, 언제나 ‘실공(實功)’과 ‘실효(實效)’를 강조하였다.
그는 〈만언봉사〉에서, “정치는 시세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일에는 실지의 일을 힘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 정치를 하면서 시의(時宜)를 알지 못하고
일에 당하여 실공을 힘쓰지 않는다면, 비록 성현이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치효(治效)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라 하였다.

그리하여 이이는 항시 위로부터 바르게 하여 기강을 바로잡고 실효를 거두며, 시의에 맞도록 폐법을 개혁하며, 사화로 입은 선비들의 원을 풀어주고,
위훈(僞勳)을 삭탈함으로써 정의를 밝히며, 붕당의 폐를 씻어서 화합할 것 등 구체적 사항을 논의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기(國基)를 튼튼히 하고
국맥(國脈)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성현의 도는 ‘시의와 실공’을 떠나서 있지 않으므로 현실을 파악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요(堯)·순(舜)·공(孔)·맹(孟)이 있더라도 시폐(時弊)를 고침이 없이는 도리가 없는 것이라 하였다.
이와같이, 이이에 있어서 진리란 현실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며,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여기에 이(理)와 기(氣)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율곡 성리설의 특징을 보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5. 학문과 업적
이이는 시대에 따라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일이 각기 다른 것이라 하였다. 그는 ‘창업(創業)’과 ‘수성(守成)’ 그리고 ‘경장(更張)’의 과정으로 나누어
논하였으며, 당시를 경장기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이는 〈동호문답〉에서 가장 큰 폐법으로 다섯가지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것은 모두 민생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① 일가절린(一家切隣)의 폐,
② 진상번중(進上煩重)의 폐, ③ 공물방납(貢物防納)의 폐, ④ 역사불균(役事不均)의 폐, 그리고 ⑤ 이서주구(吏胥誅求)의 폐를 꼽았다.
그것은 당시의 시대상과 민중의 질고(疾苦)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이었으며, 그는 국세조사와 같은 전국적인 규모의 조사를 실시하여 실정에 알맞게
폐법을 개혁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밖에도 이이는 〈만언봉사〉·《성학집요》 및 수많은 상소문을 통하여 정치·경제·문교·국방 등에 가장 절실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더 나아가 이이는 국정을 도모함에 있어서도 일개인이나 일부 지도층으로부터 하향식으로 수행될 것이 아니요, 언로를 개방하여 국인은 다 말할
수 있고, 위정자는 중지(衆智)를 모아야 한다고 보았다.
조광조에게 있어서도 그러하였지만, 이이에게 있어 언로의 개색(開塞)은 국가흥망에 관계되는 중대한 일로서 강조되었다.
공론(公論)은 국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국인의 정당한 일반의사가 곧 국시(國是)가 된다. 여기에서 언로의 개방성과 여론의 존중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이이는 경제사(經濟司)의 창설을 제의하면서 단지 기성관료가 아니라 시무를 밝게 알고 국사를 염려하는 사류로서 윤리성과 합리성을
겸비한 최고의 지성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위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이이는 그의 논의에 있어서 항시 실사와 실공에 토대를 두었던 것이며, 이렇듯 성리와 실사, 의리와 공리, 인간과 사회,
이념과 현실, 실사와 원리 등 형이상하와 내외본말을 적의(適宜)하게 갖추었던 그의 사상이 성리학으로 집약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일컬었던 바 의리와 실리의 상호매개 이론을 보았거니와, 이이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단지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그의 구체적인 시책
속에서 시(是)와 이(利)를 하나로 구현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의리와 실리의 양면은 후기에 있어서 한국의 의리학과 실학으로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때로는 의리와 실리가 조화를 이루는 바
연관성을 가지기도 하였으나, 때로는 양자가 균형을 얻지 못하고 어느 한편으로 기울어지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 중기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전개에 있어서 율곡성리설이 끼친 영향에 대하여 매우 주의깊게 관찰하여야 할 문제를 볼 수
있거니와, 그의 성리사상은 오늘에 있어서도 유심과 유물, 주체와 상황, 그리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부터 양자의 조화와 발전을 도모함에 있어서
새로운 방향을 던져주는 바라 하겠다.

 

이건물이 오죽헌의 본채이고 오른쪽방이 율곡이 태어난 방 몽룡실이다. 

 율곡을 기리는 문성사

 

 

 

 

 

 

 

 

 

 

 어제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