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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제주

제주의 아픈역사, 삼별초군 최후의 격전지 항파두성과 환해장성

by 柔淡 2010. 7. 20.

퀸즈하우스에서 나와 다음으로 간곳은 서귀포 제주 국제컨벤션센타 인근에 있는 아프리카 박물관이다.

아프리카 박물관을 간단히 돌아보고 다음으로 간곳이 애월읍 유수암리에 있는 항몽유적지 항파두성이다.

 

이 성은 1271년(고려 원종 12년) 삼별초가 진도로부터 이곳 제주도로 밀려 들어오면서 대장 김통정장군이 쌓은 것이다.

몽골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쌓은 이 성은 길이가 15리에 달하며 내성과 외성으로된 이중 성인데 내성은 돌로 쌓은 석성이며

외성은 토성으로서 지금까지도 그 형태가 남아 있다.
  당시 이 성안에는 여러 가지 관아와 군사시설이 갖추어져 있었고 강화와 진도를 거쳐온 개경의 관리와 그 가족들 그리고 삼별초의

장병들이 기거하여 이 성은 일종의 망명정부의 수도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이곳에서 그들은 호국의 얼을 불태웠던 것이다.

 

[항파두리 항몽유적지의 역사적 의의]
  이곳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는 고려시대 후기 몽골군이 침입했을 때 삼별초군이 이에 맞서 끝까지 싸웠던 호국 격전지이다.

[몽골군의 침입과 삼별초]
  몽골(원나라)은 세계 정벌의 일환으로 1231년(고려 고종 18년)부터 고려에 여러차례 쳐들어왔다. 고려는 몽골과의 싸움에서 밀리자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여러 해 동안 대항하였으나 끝내는 몽골에게 굴복하고 개성으로 환도하였다. 이에 배중손 등은 자주호국의

기치를 내걸고 고려를 몽골의 침입으로부터 끝까지 지키고자 1270년(고려 원종 11년) 6월 군사를 규합하고 대몽 항전을 결의하였다.

이때 중심이 되었던 군대가 바로 '삼별초'였다.

[삼별초군의 항전과 항파두리의 역사]
  강화도에서 진용을 정비한 삼별초군은 근거지를 진도로 옮겨 대몽항전을 펼쳤다. 그러나 1271년(고려 원종 12년) 5월 진도가 고려·몽골

연합군에게 함락하자 김통정 장군은 잔여세력을 이끌고 제주도에 들어와 이곳 항파두리에 진지를 마련하고 내·외성을 쌓았다.

특히 외성은 흙과 돌맹이를 섞어서 쌓은 토성으로 그 길이가 15리(6Km)에 달하였으며, 토성 위에는 나무를 태운 재를 뿌려서 연막전술을

폈다고 한다. 즉 적이 나타났을 때 말꼬리에 빗자루를 매달아 달리게 하면 자연히 재가 하늘로 날아 올라 연막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바닷가를 따라 3백여리에 달하는 환해장성을 쌓아서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몽골과 고려 조정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삼별초군이 굴복하지

않자 고려의 김방경과 몽골의 혼도가 이끄는 고려·몽골연합군 1만 2천여명이 1273년(고려 원종 14년)4월 함덕포와 비양도로 상륙하여 공격하였다.

삼별초군은 이에 맞서 혈전을 벌였으나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김통정 장군은 붉은 오름으로 퇴각한 뒤 자결함으로써

몽골 침입이후 40여년에 걸친 삼별초군의 항몽투쟁은 끝이 났으며 제주도에서 최후까지 항쟁한 2년 6개월의 자취가 곧 이 항파두성 사적지이다.

[역사적 의미와 제주사회에 끼친 영향]
  몽골에 점령당한 제주도는 이후 목장을 경영하는 방식이나 언어와 생활습속 등에 몽골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또 삼별초군과 이들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에 들어옴으로서 토목과 건축기술, 양잠과 직조기술, 새로운 농경법이 보급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중앙의 문물과 제도,

불교 문화가 이곳 제주도에 전래되었다.

[항파두리에 얽힌 전설]
  이곳 항파두리에는 김통정 장군이 적군이 침입하였을 때 성에서 뛰어 내리면서 밟은 돌에 발자국이 생기고 또 그 곳에서 물이 솟아 나온다는

'장수물'과 삼별초군이 활쏘기를 연습할 때 화살을 맞아 자국이 생겼다는 '살 맞은 돌' 등 여러가지 전설들이 생생하게 전해오고 있다.

[항파두리 항몽유적지의 복원]
  항몽 최후의 격전지였던 이곳 항파두리가 호국항쟁의 정신도장으로 빛을 보게 된 것은 7백여년이 지난 1976년 9월 9일 제주도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면서부터이다. 1978년 6월에는 유적지 복원사업에 따라 항몽순의비를 비롯하여 전시관·관리사 등이 설치 되었고 1997년 4월 18일에는

국가지정 사적 제396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삼별초군의 자주호국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면서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겠다.

 750여년이 지났지만 토성의 흔적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이곳도 올레길의 일부분이다.

 

 

 

 

 우리가 몰고다니 통일렌트카

 

 안개에 싸인 항파두성 일대가 신비스럽게 다가 온다.

 

 올레길 표시

 

 

 

 

 이곳 항파두성을 보기전 먼저들른곳이 있는데 삼별초군의 대장 김통정장군의 전설이 얽혀있는 유수암리의 유수암천과 태암강당터,

그리고 700여년이 넘은 팽나무와 무환자나무가 있는 절산이다. 

 

 북제주군 애월읍 유수암리에 위치한 ‘유수암천(流水岩泉)’은 김통정 장군이 이끄는 삼별초군이 항파두성을 근거지로 삼고 고성리의

‘구시물’과 ‘옹성물’, ‘유수암천’을 식수로 사용하게 되면서 그 형태가 이뤄지게 됐다고 전한다.

현재 유수암천에는 두 칸으로 나눠 식수조와 저수조를 만들고 수로를 통해 다시 20여m 떨어진 곳에 세 칸으로 구분된 빨래터를 만들어

놓았다. 또한 이 곳에서 흐른 물로는 연못을 만들어 놓았다. 예전에 인근 장전리·소길리 주민들도 이 물을 식수용으로 사용했을 정도로

깨끗함과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는 유수암천에는 과학적으로 물을 사용했던 선인들의 지혜가 그대로 담겨 있다.

현재 유수암천의 머릿돌 옆 비석에는 물에 대한 소개를 자세히 전하고 있다. 또 유수암리의 설촌유래를 담고 있는 표지판에는 ‘고려 원종

12년(1271)에 항몽 삼별초군이 항파두성에 웅거할 때, 함께 따라온 어느 한 고승이 유수암 절동산 아래 용출하는 맑은 샘을 발견하고,

언덕 아래 암자를 지어 ‘태암감당’이라 이름하고 불사를 시작한 것이 이곳에 처음으로 인적이 닿은 시초’라고 기록돼 있다.

또한 ‘태암감당은 후일 중건돼 태산사로 개칭했다가 조선시대 척화스님이 사찰을 재중건하고 천고사라 이름하였으나, 조선 숙종 27년

이형상 목사에 의해 훼손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지금도 유수암천 인근에는 속칭 ‘절동산'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태산사(泰山寺)터이다. 태산사는 유수암천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쪽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태산사에 관한 문헌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지만, 현재 절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백상감청자편을 비롯한 인화분청사기·상감분청사기·도질토기편 등이 발견되고 있다.

학계에서는 백상감청자편으로 보아 상한년대는 대략 1100년 정도이며, 조선 청자·백자편으로 볼 때 1600∼1700년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절터 주변에는 무환자 나무들이 있는데, 옛 태산사의 스님들이 염주를 만들기 위해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지금도 마을사람들은 고된 밭일을 마치고 유수암천을 찾는다. 마을사람들에게는 유수암천이야말로 수백 년 동안 삶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 온

마음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태암강당, 나중에 태산사라는 절로 중창되었는데 수백년된 무환자나무(염주를 만드는 열매가 달리는 나무)가 여러그루 남아있다.

 

 수령 450년된 팽나무

 

 나무의 위용이 대단하다.

 

 

 

 첫날이어서 여기까지 둘러보고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이틀후 마지막날, 또다른 항몽유적인 애월읍 바닷가의 환해장성을 찾아 보았다.

 

배를 타고 들어오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제주도에서는 해안선을 따라가며 성을 쌓았는데 이를 환해장성이라 한다.

『탐라지』의 기록에 따르면 원종 11년(1270) 진도에 있던 삼별초가 제주도로 들어오려 하자 이를 막기 위해 김수, 고여림이 군사들과

제주도민들을 동원하여 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패하였고, 이긴 삼별초는 또다시 관군을 막기 위해 계속 성을 쌓았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왜구들의 침입을 막기 위한 성으로 변하여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또한 헌종 11년(1845)에는 영국의 배들이 우도 앞바다에 머물면서 흰 깃발을 세우고 한달동안 측량을 하면서 돌을 모아 방위 표시를

한 일이 있었다. 이 때 제주목사였던 권직이 크게 놀라 군사를 총동원하여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였으며, 그 해 겨울 도민들을 모두

불러모아 성을 다시 쌓았다고 한다. 지금 남아있는 성들은 이때 보수했던 성으로 추정된다.

현재 성벽이 남아있는 곳으로는 온평리, 행원리, 한동리, 동복리, 북촌리, 애월리, 고내리 등 14곳이 있다. 김상헌이 지은 『남사록』에는

환해장성을 일러 ‘탐라의 만리장성’이라 부르고 있다.

 

 

 장성 안에는 우리역사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배추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한쪽에는 우리고유의 물고기 잡는방법인 독살 어방이 보인다.

제주는 육지에서 많이 떨어져 있어 우리민족 역사상에 있었던 932회의 외침을 피해간줄 알았는데 제주의 속살을 하나씩 파헤쳐 볼수록

오히려 외침으로 인한 피해와 왜구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삼별초위 몽고항쟁부터 임진왜란, 일제시대 알뜨르 비행장과 미군의 폭격을 피하기위한 동굴파기, 4.3 사태, 6.25때의 신병훈련소 설치 등등  

작은섬이라 오히려 고초가 더욱 컷으리라는 짐작이다.

 

흔히들 "평화의섬 제주" 라 하는데 말그대로 평화가 지켜져서 아름다운 제주를 자손만대까지 물려줄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