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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부산·울산·대구·경상

[대구달성]명필 추사의 글씨가 전해 내려오는 남평문씨 세거지

by 柔淡 2011. 7. 7.

앞서 남평문씨 세거지의 돌담길과 능소화, 회화나무 등을 소개헸는데 이번에는 건물들이다.

이곳은 우리나라에 목화시를 처음 갖고와 재배한 문익점의 후손들이 만들어 놓은 집성촌으로

영남지방 양반가의 전형일 뿐만 아니라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있고 조선말기 개인이 수장한

도서로는 가장 많은 만권의 한적과 그책을 열람하기 위한 별도의 독서실을 갖춘 독특한

곳으로 이름이 나있다.

  

먼저 건물들과 풍경을 살펴보자

 

(남평문씨 인흥세거지 홈피인용 http://www.inheung.com/main/main.asp)

월배에서 화원초등학교를 지난 다음 천내교 바로 앞에서 왼쪽으로 굽어 들어가 천내천을 따라

3km정도 가면 왼쪽으로 한옥이 많이 보이는 곳이 인흥마을이며 바로 남평문씨 본리 세거지이다.

주택들은 산 밑의 양지바르고 아늑한 장소에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천내천이 흐르고 있어

명당의 기본적인 요건인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춘 마을이다.

마을은 주택 9호, 재실 2채, 문고 1개소 등 크고 작은 60여채의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남평문씨는 목화씨를 들여온 고려시대의 충신 문익점이 증시조이다. 남평문씨가 대구에 입향한 것은

대체로 500여년전으로 추정되며 이곳 인흥에 터를 잡은 것은 문익점의 18세손인 인산재(仁山齋)

문경호(1812∼1874) 때이다.

 

그는 문씨만의 마을을 만들 것을 계획하고 원래 절이 있었던 명당터인 이곳에 정전법에 따라 구획을

정하여 터전과 도로를 반듯하게 한 뒤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하였다. 세거지에서 최초로

건립한 건물은 용호재(1834년)로서 현재의 광거당이 있는 곳이었다.

 

주택이 들어선 것은 1856년으로 처음에는 초가였으나 1873년 이후에는 모두 와가로 지어지게 되었다.

마을의 대표적인 건물 중 하나인 수봉정사(壽峰精舍)는 세거지 전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당초 수봉선생이

돌아가신 후 그의 뜻을 기리기위해 1936년 지은 건물이며 광거당(廣居堂)은 1910년 용호재터에 접객과

자제들의 학덕 증진을 목적으로 건립한 건물이다.

 

이곳 세거지는 건축연대가 200년 미만이나 전통적인 영남지방의 양반가옥의 틀을 지키고 있으며 오늘날의

도시계획처럼 도로망이 정비되어 있는 등 주위의 환경과 조화를 이루도록 마을을 구성한 예 또한 희소하여

큰 의의를 갖고 있다.

 

 세거지 전경, 배산임수의 지형으로 한눈에 봐도 명당이다.

 

 여러채의 기와집.안쪽으론 들억보지 못했다.

 

 

 

 광거당이 있는 건물

 광거당

 

 수석노태지관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수석, 묵은 이끼, 연못으로 이루어진 집이란 뜻이라고....

 

 

 광거당 현판

 

 다음은 소봉정사로 간다.

 이 마으르이 대표적인 건물로 수백당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경귀당. 위창 오세창의 글씨다.

 

 수백당

 

 

 

 돌담장의 접시꽃이 아름답다. 

 

다음은 이곳의 가장 귀중한 보물 인수문고를 설명 하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