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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조선최고의 개혁정치가 정암 조광조 선생의 묘역과 심곡서원

by 柔淡 2012. 8. 27.

내가 살고 있는 용인지역 문화재 찾아보기의 일환으로 앞에서는 포은 정몽주 선생묘와 그를 모신 충렬서원을

소개했다. 이번에는 조선 최고의 개혁가로 손꼽히는 정암 조광조 선생의 묘소와 그를 모신 심곡서원이다.

 

세상 모든일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인터넷에서 조광조 선생의 유적을 찾아보니 바로 옆동네인

상현동에 그의 묘소와 심곡서원이 있지 않은가! 전에 몇번 밥먹으러 갔던 식당 바로 옆에 심곡서원이

있고 거기서 몇백m 도 떨어지지 않은곳에 선생의 묘소가 있었다.

 

조선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감찰 원강(元綱)이다.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희천에 유배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때부터 시문은 물론 성리학의

연구에 힘을 쏟았고, 〈소학 小學〉·〈근사록 近思錄〉 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경전에 응용하는 등, 20세 때 김종직

(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가장 촉망받는 청년학자로서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김굉필이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위에 찬성했다 하여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

등과 함께 처형되면서 가족과 제자들까지도 처벌당하게 되자, 조광조도 유배당하는 몸이 되었다. 정계의 현실을 몸소

겪은 그는 유배지에서 학업에만 전념했다. 1510년(중종 5)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했는데, 이때는

연산군 시절의 폐해에 느낀 바 있어 '정군심'(正君心)·'치군지'(致君知)를 급선무로 삼아 〈대학〉의 도를 역설하는 한편,

도학정치·철인정치를 주장한 대자성 유숭조(柳崇祖)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초임되었고, 이어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전적·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면서

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해에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고 중종의 계비 책봉문제가 논의될 때, 박상(朴祥)·김정(金淨)

등이 폐위된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하다 반정공신(反正功臣)인 대사간 이행(李荇)의 탄핵으로 유배되자, 정언으로 있던

조광조는 대사간으로서 상소자를 벌함은 언로(言路)를 막는 결과가 되어 국가의 존망과 관계된다고 주장하여 오히려 이행

등을 파직하게 했다. 그뒤 수찬을 거쳐 호조·예조의 정랑을 역임했다. 그는 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입시(入侍)할 때마다 도학

정치를 역설했다. 당시는 연산군이 정치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직후로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시대적

추세였고, 중종은 조광조의 정치사상을 바탕으로 이상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1517년 교리로 경연시독관·춘추관기주관을 겸임했으며, 〈여씨향약 呂氏鄕約〉을 반포·간행하여 8도에 시행하도록 함으로써

향촌의 상호부조와 서민의 복리증진을 꾀했다. 1518년 부제학이 된 후 미신타파를 내세워 당시 폐해가 많아 지식층 사이에

비난이 많았던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강력히 주장해 이를 혁파했다. 그해 11월에는 대사헌에 승진하고 세자부빈객(世子副

賓客)을 겸했다. 이때에 당시의 과거가 사장(詞章)에만 치중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내외의 요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각각

재(才)·행(行)이 있는 선비들을 천거하여 왕이 선택하게 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여 이듬해에 이를 실시했다.

현량과의 실시로 김식(金湜)·기준(奇遵)·한충(韓忠)·김구(金絿)·김정(金淨) 등 소장학자들이 발탁되어 정계에 진출했다

 

이후 조광조와 그의 동지들인 소장학자들은 조정의 내외요직에 포진하여 당시를 이상정치 실현의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새로운 제도의 실시와 전래 제도의 개혁, 교화의 보급 등을 통해 이상적인 정치를 시행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훈구파를

외직으로 몰아내는 한편, 1519년 반정공신 중 지나치게 공을 인정받은 사람의 훈작을 삭탈할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신진사류의

위훈삭제(僞勳削除) 요청은 이미 기성 귀족이 되어 있는 훈구파의 강력한 반발을 샀고, 왕도 급격한 개혁주장을 꺼리고 있어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조광조 등의 요청이 강력했기 때문에 마침내 전(全) 공신의 3/4에 해당되는 76명의 훈작을

삭제하게 되었으며, 이는 기묘사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훈구파 중에 조광조 등 신진사류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예조판서 남곤(南袞)과 도총관 심정(沈貞)은 홍경주(洪景舟)와 모의

하여, 대궐 후원의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가 갉아먹게 한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이것을

왕에게 바쳐서 의심을 조장시켰다. 또한 홍경주를 시켜 조광조 등이 붕당을 짓고, 사리(私利)를 취하며, 젊은 사람으로 하여금 나이

든 사람을 능멸하고, 낮은 이가 귀한 이를 업신여겨 국세를 기울게 하여, 조정을 날로 그르친다고 탄핵하게 했다.

신진사류를 비롯한 조광조의 도학정치와 급진적 개혁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훈구파의 탄핵을 받아들여 1519년 조광조·김식·

김구·김정 등을 투옥하고 이어 사사(賜死)의 명을 내렸다. 그러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변호로 일단 사형이 면제되어 능주(綾州)에

유배되었다.

그후 훈구파의 김전(金詮)·남곤·이유청(李惟淸)이 3정승에 임명되자 현량과가 폐지되었고, 조광조는 그해 12월에 사사되었다(→ 기묘사화 ).

 

조광조 등 신진사류들의 도학정치사상을 바탕으로 한 급진적 개혁정책은 연산군 이후의 혼란을 극복하고, 요순시대(堯舜時代)와 같은

이상정치를 실현함으로써 국가의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실행방법이 급진적인 것이어서 왕권을 배경으로 한

훈구세력의 반발을 샀고, 결국 개혁정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의 도학정신은 후세에 계승되어 이황(李滉)·이이(李珥) 등의 유학자

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사림에게는 정신적인 표상이 되었으며, 한국 유학의 기본적인 성격을 형성했다(→ 색인 : 성리학).

선조초에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능주 죽수서원(竹樹書院), 양주 도봉서원(道峰書院), 희천 양현사

(兩賢司)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정암집 靜庵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어느시대나 급진 개혁세력은 있게 마련인데 너무 젊은 나이에 관직에 나아가 급진개혁을 부르짖은게 기묘사화의 원인이되고

그때문에 즉음에 이르렀으니 예나 지금이나 개혁은 참으로 어려운 과제다.

그런데 이 기묘사화 때문에 벼슬을 마다하고 영호남에 은거해서 학문에 정진하고 별서를 지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문화재가 있으니 그 대표적인 예가 호남의 소쇄원, 영남의 청암정이다.  

 

 조광조를 모신 심곡서원

 조광조 묘역 입구

  

 

 

 

 

 

 

 조광조 선생 신도비

 

 

 조광조 선생 후손드르이 묘도 같이 있다.

 

 

 

 

 

 

 조광조 선생 묘.

 

 예전에는 한적한 시골 이었는데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변해 버렸다.

 

 조강조 선생묘

 

 산너울길 이라는 표지가 있다. 

 심곡서원

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정암 조광조(1482∼1519) 선생의 뜻을 기리고 제사지내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선생은 조선 중종(재위 1506∼1544) 때 사림파의 대표로 급진적인 사회개혁정치를 추진하다가 기묘사화(1519) 때 죽음을 당하였다. 효종 원년(1649)에 세워 ‘심곡’이라는 현판과 이름과 토지·노비 등을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무사했던 전국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서, 선현에 대한 제사와 지방교육을 담당하였다. 마을 뒤쪽 야산에 서쪽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입구의 홍살문과 내삼문·외삼문·강당인 일소당·사당이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강당은 서원 안의 여러 행사와 유림이 모여 회의와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로서 각 칸마다 널문을 달아 사면을 전부 열 수 있게 하였다.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사당은 앞면에 트인 퇴칸이 있으며 옆면과 뒷면에는 방화벽을 설치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사당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았으며, 내삼문은 3칸의 솟을대문 형식이다.

 

 

하필이면 공사중이다.

 

수령 500년이상된 느티나무 두그루가 우람하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집에서 가까운 곳의 역사문화 유적을 이제서야 찾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