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서울·경기·인천

강화도 유적지 (07. 01. 20)

by 柔淡 2007. 1. 24.
산행을 마치고 강화도 바닷가를 돌아나오며 광성보와 돈대를 돌아보았다.
 
 
 
 
보[堡]
 

조선시대 국경 지역의 요충지에 설치한 작은 요새.

대개 소수의 군사를 배치하고 하급 지휘관을 임명하여 지휘하도록 했으며, 일부는 군사만 배치했다. 본래 보는 흙이나 돌로 쌓은 작은 성(城)을 뜻한다. 때로는 돌로 쌓은 것을 성이라 하고, 흙으로 쌓은 것을 보라 하여 구별하기도 했지만 조선시대의 보는 대부분 석성이었으며, 토성이나 목책은 소수였다. 규모도 둘레가 100자가 못 되는 것부터 3,000자가 넘는 것까지 다양했다. 1433년(세종 15)부터 평안도와 함경도 국경지역에 장성(長城)과 행성(行城)을 쌓으면서 진(鎭)에 버금가는 국방 요충지에 구자(口子)를 증설하고 만호(萬戶)를 임명하여 지키도록 하는 한편, 구자에 성을 쌓아 주민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한 조치에 따라 보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뒤에 장성을 따라 2개 도에 걸쳐 수십 개의 보가 신설되어, 만호나 권관(權管) 등을 두어 지키도록 했다. 15세기 말엽 이후 왜구 침입에 대비해 국방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남부 해안지역인 김해·흥양과, 남해도·거제도 등 큰 섬에도 몇 개의 보를 설치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북방에 설치되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1530년(중종 25) 당시 사용중인 보만 북방의 2개 도에 84개였고, 남방은 6개에 불과했다. 보는 조선 후기에 다소 줄었으나 말엽까지 남아 있었다.

 

 

 

 

 

 

 

 

 

 

 

 

 

 

 

 

 

돈대[墩臺]
 
 

성벽 위에 석재 또는 전(塼)으로 쌓아올려 망루(望樓)와 포루(砲樓)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높직한 누대(樓臺).

돈대의 형태는 원형과 방형 2가지가 있으며, 내부에는 2~3단의 마루를 만들고 외부를 향한 벽면에 각 층마다 작은 안혈(眼穴)을 내어 대포·총·화살을 쏠 수 있도록 하였다. 돈대 설치의 기록은 조선시대 문헌에서 나타난다. 〈남한지 南漢志〉에 인조(1623~49 재위) 때 수축된 남한산성에 2기의 돈대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1679년(숙종 5) 병조판서 김석위(金錫胃)의 건의에 따라 강화에 53개소의 돈대가 설치되었는데, 〈여지도서 輿地圖書〉에 그 명칭과 위치가 그려져 있다. 1796년 완공된 수원 성곽의 서북·남·동북의 3곳에 돈대가 설치되었는데 이를 공심돈(空心墩)이라 불렀으며 수원성(華城)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시설물이다. 현재는 서북 공심돈만이 남아 있다. 이러한 공심돈은 서양 중세 봉건제후 성의 일부인 탑과 유사한데 수원성 성역에 참여했던 정약용이 〈기기도설 奇器圖說〉을 연구한 것으로 미루어 서양 성곽을 본뜬 것으로 짐작된다.

 

 

 

 

 

 

 

 

 

 

 

 

 

 

 

 

 

 

 

 

 

 

 

'국내여행 > 서울·경기·인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해일출 2 (07. 01. 28)  (0) 2007.02.02
한라산 3 - 서해일출 (07. 01. 28)  (0) 2007.02.01
청계천 야경 (06. 12. 23)  (0) 2006.12.26
남산 N타워 (06. 12. 23)  (0) 2006.12.24
남함산성 1 (06. 12. 02)  (0) 2006.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