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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고궁,사찰,기타)

창경궁 4 - 역사와 건물들 (08. 11. 13)

by 柔淡 2008. 11. 25.

창경궁(昌慶宮)은 성종이 당시의 세 대비, 곧 세조 비 정희왕후 윤씨, 덕종 비 소혜왕후 한씨, 예종 비 안순왕후 한씨를 위해,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머물렀던 수강궁 자리에 1483~1484년에 걸쳐 세운 궁궐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

하면서  동시에 독자적으로도 궁궐로서의 완결성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 자체로도 궁궐로서 필요한 공간 구조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에서 법전인 명정전까지는 그 규모나 격식 면에서 창덕궁보다 격이  낮게 조성되었음이 눈에 띈다.

 

이것은 그 거리가  짧고 중간의 문도 생략되어 있으며, 축도 남향(南向) 이 아닌 동향(東鄕)을 하고 있는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외전과

궐내각사는 빈약한데  반하여 내전과 생활 주거 공간은 상대적으로 발달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창경궁이 왕의 정치와 행정, 제의(祭儀) 등

공식성이 강한 활동을 위한 공간은 미약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창경궁은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상호보완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래서 창덕궁과

더불어 동궐로 불리기도 하였다. 창경궁은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불탄 이후 광해군에 의해 중건되었으나, 인조반정 이후 일어났던 이괄의 난

으로 다시 상당히 망가졌다. 이렇게 되자 서궐로 지어졌던 인경궁의 건물을 헐어다 옮겨 짓는 방식으로 궁궐을 보수했다. 1633년 7월 인조는

창덕궁에서 창경궁으로 이어했다. 순조 연간의 화재로 다시 크게 훼손된 이후 수리를 거친 창경궁은, 일제시대 창경원으로 격하되면서 박물관이

들어서고 담이 헐리면서 내전 건물의 바닥은 모두 마루로 바뀌어 전시 공간으로 활용됐으며, 남쪽에 동물원과 북쪽에 식물원 등이 설치되어

일반인에게 놀이터로서 개방되었다.

해방 후에도 산업화로 팽창되는 서울의 부족한 휴식 공간을 채워주기 위해  창경궁의 희생을 강요했고, 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창경궁’이라는

제 이름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찾은 것은 이름 뿐, 빼곡이 건물이 들어차 있던 제 모습은 더 이상 찾을 길이 없다. 현재의 창경궁은 수난을

겪고 최근 약간 복원된 모습이다. 견뎌낸 세월과 고난만큼 왕에서 이름 없는 궁녀들에 이르기까지 그 속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창경궁은, 사람 사는 집인 동시에 국가를 경영하는 최고의 관청인 궁궐로서 역사를 말해주는 살아있는 박물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풍기대

자경전 터에서 춘당지에 이르는 길에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재던 기구인 풍기대와 해시계인 앙부일구(모조품)가 있다.

이처럼 궁궐 안에는 자격루, 측우기, 간의 등과 같은 과학 기구가 많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국왕이 국정 운영을 위해

자연 현상을 잘 살피고 책임지라는 이야기가 될 터이다

 

 

 

 

 

 

 

통명전

문 없는 문을 지나고 담 없는 담을 넘어가면 구중궁궐의 가장 깊숙한 곳, 통명전(通明殿)을 만나게 된다. 통명전은 중궁전,

즉 왕비의 처소로서 다른 궁궐의 중궁전처럼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내전의 큰 행사를 위하여 마당에 조정과 같이 박석을 깔아놓고

높고 넓다란 기단인 월대를 설치한 점에서 왕비의 위신과 그에 대한 배려를 읽을 수 있다. 왕비에 대한 특별한  배려는 국모로서

왕비가 해야 했던 의무의 대가이다. 왕비는 누에를 치고 포를 짜는 등 국모로서 모범이 되는 행동을 하고, 궁궐 안으로는 궁녀에서

후궁에 이르는 많은 여인들과 궁궐 밖으로는 관료들의 부인들을 아우르는 내,외명부를 다스리는 바쁜 삶을 살았다.

한편 왕비는 궐 밖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갇혀 사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러한 왕비를 위한 뜻으로 통명전 옆에는 난간을 두르고

괴석으로 장식한 못인 연지가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다.

 

 

 

양화당

통명전 옆에 있는 양화당(養和堂)은 통명전보다 단출하고 규모도 작다. 이 건물은 인조가 병자호란 이후 머물렀던 곳이며, 철종 비인 철인왕후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영춘헌과 집복헌

양화당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영춘헌과 집복헌이 있다.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행각이다. 영춘헌은 정조가 승하한 곳이며, 집복헌에서는 사도세자와 순조가 출생하였다. 그러나 일제시기 이후 창경원의 관리사무소로 쓰이면서 그 모습이 크게 변형되어 최근에 복원하였다.

그런데 1820년대 후반의 그림인 동궐도에서 보이는 영춘헌과 집복헌의 모습은 20세기 초의 동궐도형(창덕궁과 창경궁을 도면으로 제작한 것)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금의 복원된 건물은 동궐도형의 모습에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경춘전과 환경전

경춘전(景春殿)과 환경전(歡慶殿)은 서로 어슷하게 내외하듯 쳐다보고 앉아 있다. 가려줄 담도 없이 터줄 문도 없이 덩그러니 앉은 품이 어색하다.

순조 때 화재가 나 새로 지었을 때만 해도 온전하였으나 일제 때 창경원이 되면서 방을 뜯어내고 통마루를 깔아 전시관으로 쓰면서 본모습을 잃었다.

환경전 남쪽의 잔디밭은 지금은 없는 옛 건물의 무덤이고 그 잔디밭 위에 선 석탑은 창경원 시절에 조경용으로 그냥 옮겨 놓은 것이라 한다.

사람의 온기 없이 찬바람만 도는 이 곳도 예전엔 건물들이 서로 어깨를 기대고 건물을 둘러싼 담과 문이 사람의 삶을 감싸고 숨쉬게 하던 곳이었다

 한창 때 경춘전은 인수대비의 말년의 삶과 인현왕후의 죽음, 그리고 혜경궁 홍씨의 아들, 정조의 출생을 바라보기도 하였다. 환경전은

왕과 왕세자 등 남자들이 주로 사용했던 곳으로 중종과 소현세자가 여기서 죽음을 맞았다.

 함인정

숭문당 오른편 빈양문(賓陽門)을 넘어서면 왕과 왕비의 기거 활동 공간인 내전이 펼쳐진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물은 정자인 ‘함인정(涵仁亭)’이다.

함인정은 사면이 모두 트인 형태의 정자로 정자로서는 규모가 큰 편이다. 천장을 보면 가운데가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고 둘레는 서까래가 다 드러나

있으며, 내부 바닥에 깐 마루도 중앙부가  둘레보다 한 단 높이 설치되어 있는 등 가운데와 둘레의 구별이 보이는 구조로 되어 있다. 영조는 함인정에서

문무과에 급제한 인재들을 만나보기도 하였다 한다. 함인정 내부의 사면에는 중국 시인 도연명이 지은 사계절에 관한 시, ‘사시(四時)’가 춘하추동

한 구절씩 방위에 맞춰 동남서북에 배치되어 있다.

 

 

 

 

 

명정전과 문정전, 숭문당은 바쁘게 다니느라 찍지 못했는데 지난 2006년 2월에 찍은 내용을 참고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