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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경기·인천

소화묘원과 다산유적지 (09. 01. 01)

by 柔淡 2009. 1. 7.

일출 촬영이 끝난후 데이지의 후배님들과 두물머리 두부집에서 아침을 먹고 각자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 오는길, 한두군데를 더 돌아보려고 팔당댐 옆의 천주교 공원묘지와 조안면 능내리의

다산유적지에 들렸다.

 

소화묘원 (천주교 공원묘지)

 여기서도 두물머리 일대의 풍경이 멋지게 내려다 보인다.

 

 

 

 

 

 

 

 

 

 

 

 

 

 

 

 

 

다산유적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위치한 다산 유적지는 나라의 부패를 꾸짖던 선생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꼿꼿하고 검소한 그의 생활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생가 여유당, 이백 년 세월의 바람 앞에 절로 고개 숙여지는 다산의 묘,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의 업적과 자취가 전시된 다산기념관과 다산을 현대적 시각

으로 재조명해보는 다산문화관이 있다.
한 걸음이면 뛰어 넘을 수 있을 것 같은 여유당의 낮은 담장에는, 허물없이 백성들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하고자 했던 다산의 마음이 담겨있다.

 

18년이란 장기간에 걸친 유배생활 속에서도 민생을 위한 경세의 학문인 실학을 연구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5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하고도 귀중한

저서를 남긴 다산은 모두 함께 더불어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정치, 경제, 교육, 사회전반에 걸친 개혁을 부르짖은 시대의 ‘개혁가’이자 애국ㆍ애민

의 한 길만을 걸었던 참 선비였다.

실학의 체계를 완성한 대학자이며, 일찍이 북학을 받아들여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을 만들고자 밤새 고민했던 과학자, 1년에 ·100편이 넘는

시를 쓴 의욕적인 예술가였던 정다산, 그의 손이 거쳐간 곳이면 어디나 백성을 아끼는 마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매년 10월 유서깊은 다산유적지에서 펼쳐지는 다산문화제는 다채로운 시민행사와 놀이, 모두 함께 어우러지는 축제의 한마당으로 다산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문화적 시각으로 재조명, 우리 문화를 통해 다산선생을 직접 체험하는 시민문화축제이다.

다산문화제는 퇴계원산대놀이, 북청사자놀음 등의 다채로운 문화공연이 펼쳐지며 전통악기체험, 전통놀이체험, 다산 찻잔만들기, 우리문양 탁본찍어보기

등 선조들의 놀이문화를 체험하면서 우리문화를 체험하고 다산사상 강연회, 두리차회, 다산 알기 퀴즈대회 등을 통해 다산의 정신을 느껴볼수 있는 감동과

역사체험의 추억을 만들 수 있는 남양주의 대표적인 행사이다.

1991년도 부터 <다산묘역 정비 보강사업>을 시작으로 현재(2005)의 <다산문화 관광공원 조성사업>에 이르기 까지 남양주시가 남양주의 소중한 문화유산

의 복원과 계승발전을 위해 애쓰고 있는 곳이다

 

 

 

 

 

 

 

 

 

 

 

 

 

 

 

 

다산은 1762년(임오년,영조38년) 음력 6월 16일, 아버지 정재원(羅州丁氏-荷石 丁載遠) 과 어머니 해남윤씨(海南尹氏)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한강 강변 마현 마을이다.
당시로는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초부면(草阜面) 마재(馬峴)이고, 오늘날의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이다.

 

 나주정씨는 처음 본관을 압해(押海)로 하였으나 영조 때 나주로 본관을 바꾸었다. 시조(始祖) 고려 검교대장군 정윤종(丁允宗)으로부터 6세(六世)

공일(公逸)까지 압해도에 거주하였고 7세(七世) 원보(元甫)가 황해도 덕수(德水)로 이거하였다.

 

시조 이하 6세의 분묘는 압해도에 있었으나 고려말 압해도가 왜구의 침탈로 실토(失土)됨에 따라 실전(?)되었다고 한다. 압해도는 본래 군치(郡治)의

섬으로 박씨, 정씨, 주씨, 홍씨 등이 본거지로 하였으나 고려조에 현치(縣治)로 하였다가 현이 없어지고 나주에 소속되었다.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략

으로 빼앗겼던 비운의 섬으로 지금은 행정구역이 전남 신안군 압해면이다.
고려 말에 배천(白川)에서 살다가 이씨조선을 세울 무렵부터 서울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숙인(淑人) 해남 윤씨(海南 尹氏/1728-1770)는 윤덕렬의 딸로 우리 국문학상 대표적 시조시인으로 일컬 어지는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6세 손녀이자 詩 · 書에 두루 능했던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의 손녀였다. 윤선도의 증손자인 윤두서는 한국 회화사에 유명한 자화상을 남긴 화가로 유명하다.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1730-1792)에게는 세부인 사이에 모두 5남 5녀의 10남매가 있었다. 큰아들 약현(若鉉)은 24세로 요절한 의령 南씨(1729-1752)의

소생이며, 둘째 부인 해남 윤씨(1728-1770)에게서는 약전, 약종, 약용과 이승훈에게 시집간 누이 등이 있었다. 윤씨가 세상을 뜬 다음해 김화현의 처녀

황씨를 첩으로 삼았으나 요절해버리자 1773년 다산이 12살되던 해에 서울에서 20세의 김씨(1754-1813)를 데려왔다. 어린 다산을 친자식처럼 돌봐준 그가

서모 김씨다. 이 분이 다산이 장가들 때까지 손수 부스럼이나 종기를 치료해주고 친어머니처럼 살뜰하게 보살펴 준 서모 김씨로 형제 중에서 다산과 특별히

정이 돈독하였다. 김씨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김의택(金宜澤)의 딸로서 슬하에 삼녀 일남(약황)을 두었는데, 큰딸은 채제공의 서자인

채홍근(蔡弘謹)에게, 다음은 나주목사를 지낸 이인섭의 서자 이중식(李重植)에게 시집갔다.

 

압해 정가인 내게는  다산 정약용이 선조이시다. 그래서 더욱 이미가 깊은 정월초하루가 된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