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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아산 팸투어 - 시간의 흔적, 외암 민속마을 (09. 04. 18)

by 柔淡 2009. 4. 23.

당림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외암민속마을로 간다.

처음 들렀던 맹씨행단, 당림미술관, 외암민속마을이 전부 설화산 기슭 여기저기에 둥지를 틀고있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서 사전에 계획했던대로 외암리 안쪽 강당골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시골밥상이란 식당에서 점심을 먼저 먹고

민속마을을 둘러 보기로 한다.

 

시당으로 가는길에 본 외암마을 전경 

 시골밥상에서 먹은 정식

 음식은 깔끔하고 그런대로 괜찮은데 잘되는 식당이라서 그런지 손님이 너무 많아 정신을 못차린다.

 

 

 식당앞의 저수지. 이 식당은 광덕산 산행을 마친 등산객들과 외암리를 찾는 사람들이 주로 오는것 같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가이드의 해설을 들으며 외암마을을 자세하게 둘러본다.

외암마을에 세번째로 오지만 가이드의 해설은 처음 들어본다. 

 

마을 중요 민속자료 제 236호로 지정되어 있는 충남 아산 외암 민속마을은 약 500년전부터 부락이 형성되어 충청 고유격식인 반가의 고택과 초가돌담(총 5.3km),

정원이 보존되어 있으며 다량의 민구와 민속품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가옥 주인의 관직명이나 출신지명을 따서 참판댁, 병사댁, 감찰댁, 참봉댁, 종손댁, 송화댁,

영암댁, 신창댁 등의 택호가 정해져 있으며, 마을 뒷산 설화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을 끌어들여 연못의 정원수나 방화수로 이용하고 있다. 돌담장 길이가 500m나 되는 이끼 낀 돌담을 돌면 이 마을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데, 돌담 너머로 집집마다 뜰안에 심어놓은 감나무, 살구나무, 밤나무, 은행나무 등이 들여다

보인다.

제일 처음 보았던 맹씨행단은 최영장군이 손주사위인 맹사성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원래 외암마을의 주인은 평택진씨였다. 지금도 참봉 진한평(陳漢平)의 묘가 외암 마을 남쪽으로 약 500m의 거리인 구릉의 골말에 위치하고 있어, 과거

이 마을의 주인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묘소의 남쪽에 집터와 연못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이곳이 진참봉의 집터가 아닐까 생각된다.

오늘날 외암마을에 거주하는 주민의 절반이 예안이씨다. 시작은 평택진씨 참봉 진한평의 사위인 이사종이다. 당시 진한평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셋 있었는데,

예안이씨 이사종이 진한평의 장녀와 혼인하면서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아산 사람들은 예로부터 사위사랑이 대단했던것 같다.

 

 

이 마을은 입구의 물(다리)를 건너면서 약한 구릉지에 집들이 길을 따라 독특하게 자리잡고 있다. 마을 가운데로 안길이 있고 이 안길은 올라가면서 좌우로

샛길을 뻗치고 있다. 이러한 모양은 하늘에서 보면 마치 나무가지와 같이 큰줄기를 따라 올라가면서 작은 가지가 뻗고 가지 끝에 열매가 맺어 있는 것과 같은

자연형태와 같은 마을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듯한 마을이지만 거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원칙이 있다. 즉 마을의 동북쪽에 위치한 산을 주산이라 하는데 주산인 설화산과 서남

쪽에 위치한 봉수산을 잇는 긴 선이 이어지는 축선에 일정한 영역을 만들어 그 영역 안에 집들을 배치해 두었다. 마을의 전체적인 모양은 동서로 긴 타원형이다.

동북쪽의 설화산 자락이 마을에 이르러서는 완만하게 구릉을 만들면서 마을 앞쪽으로 흘러 내려간다. 따라서 서쪽의 마을 어귀는 낮고 동쪽의 뒤로 갈수록 높아

지는 동고서저(東高西低)형상이다. 이러한 지형조건에 맞추어 집이 앉은 방향은 거의 서남향이다.

 

외암리 마을은 입구를 가로질러 흘러가는 개천으로 인해 '안'과 '밖'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개천의 다리를 건넘으로써 마을로 들어간 것이고, 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아직 마을밖에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개천은 마을의 경계를 알려주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런 경계구분이 없는 마을에서는 마을 어귀 적당한

곳에 장승을 세우거나 솟대를 세워 자연스럽게 마을 경계를 표시하고 있다.

마을 후면에 해발 441m의 설화산이 우뚝 서있고, 그 산줄기가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몇 개의 가닥을 뻗어내려 마을 주변을 감싸듯 펼쳐져 있다. 그 산줄기 중

하나는 마을의 남쪽에 불쑥 쏫아 면잠산이 되었다.면잠산의 한 능선이 북쪽으로 흘러 마을 앞쪽에서 작은 동산을 만든것이 바람동산이다.

마을로 진입하는 다리 앞에는 송덕비, 장승, 솟대가 세워져 있다. 마을 입구를 상징하는 표시 역할을 하는 것과 동시에 마을의 안녕과 질서를 지켜주는 신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 정려는 원래 다리를 건너 마을 안에 있었으나 옮겨져 지금의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정려 또한 선조의 선행을 누대에 걸쳐 모범

으로 삼으려는 교육적 의미를 담고 있다.

 

 

마을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시설물이 물레방아와 정자이다. 물레방아는 노동공간으로 마을의 중요한 공동생활 시설물 중의 하나이다. 일정한 수량을

확보하고 있는 마을어귀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정자를 경관이 수려한 곳에 지어 놓은 유희시설이지만 반드시 유희기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농경지

가까이에 세운 것은 농민들이 힘든 농사일을 하다가 잠시 쉴수 있는 휴식장소로 이용하도록 배려한 것이다.

마을 안 경관은 안길을 중심으로 샛길들이 이어지면서 돌담과 집들이 다른 마을엣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마을의 거의 모든 담장은

돌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마을의 지질구조는 땅 밑을으로 일정한 지층에 이르기까지 호박돌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돌을 걷어내 경작지를

만들고, 집터를 확보하면서 걷어낸 돌로 담을 쌓은 것이다.

마을 안에는 2개의 정자나무(亭子木)가 있다. 하나는 마을 안길을 들어서면 샛길이 뻗어지는 고삳에 자리잡고 있고, 또 하나는 마을 후면의 가장자리인 개천

변에 있다. 안에 있는 것은 마을 동제나 마을 축제를 할때 이곳에서 제를 지내는 신성시되는 공간이다.

마을 안의 집들은 모두 사랑채와 대문채 사이의 사랑마당에 정원을 꾸며 놓았으며 각각 특색있는 정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건재고택, 송화댁, 교수

댁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크고 이 마을의 대표적인 정원인 만큼 원래의 모습을 잘 보존하면 좋을 것이다.

 

수령600년,높이 21미터, 둘레 2미터의 느티나무

전형적인 초가집 

 새로 지어진 초가집. 옛집이 자연스럽다면 새로지은 초가집은 기둥도 각이지고 뭔가 안 어울리는 듯한 모습이다.

예안이씨 종가댁 

 몇군데서 이렇게 새로 집을 짓고있다.

고증을 거쳐 옛날식으로 지으면 좋으련만 비용 때문인지 그렇지 못하다고 한다.

연엽주를 만들어 파는집인데 요즈음은 안만드는 모양이다. 

 

 이렇게 봉당에 굴뚝을 기와로 만드는건 처음봤다. 돌틈 중간에 기와로 만든게 굴뚝이라니... 

 연자,디딜방아

 

 오래된 마을답게 소나무가 멋지다.

 

 

여기도 꽃이 만개했다.

자운영 

옥매 

 금낭화

 탱자꽃

 귀룽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