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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아산 팸투어 - 소나무길이 아름다운 봉곡사 (09. 04. 18)

by 柔淡 2009. 4. 23.

외암민속마을을 둘러보고 다음 행선지인 봉곡사로 이동했다.

아산에서만 움직이기에 한장소에서 다음장소로 이동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

사실 봉곡사는 이른새벽에 와야 안개낀 소나무 숲길을 멋지게 찍을수 있는데 늦은 오후에 오니 안개낀 소나무숲의 정취는 찾기 어렵다.

 

주차장에서 봉곡사로 가는 소나무 숲길. 이런길이 700m정도 이어진다.  

 

 

봉곡사 소개

아산  송악면의 남단 봉수산의 동북 계곡에 위치한 고찰이다. 울창한 송림으로 에워싸인 진입로와 배산이 청정도장의 면모를 돋보이게 한다. 조선시대의 승람과

지리지에는 "석암사"라 했으며 1929년 환여승람에 "봉곡사"라 한 것으 로 보아 사명을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사찰입구 안내판에 신라51대 진성여왕 원년(887년)

2월에 도선국사가 창건하고 고려 18대 의종(1170년)때에 보조국사가 중창했으며 세종조(1419년)에 함허대사가 삼창하였는데, 이 때는 상암, 벽련암, 보명암,

태화암 등의 암자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에 본전과 여섯 암 자가 폐허된 것을 인조24년(1647년) 다시 중창하고 정조18년(1794년) 중수하여 봉곡사라 개칭했다.

고종7년(1891년)에 서봉화상이 법당 및 요사를 중수 현존한다. 계곡을 앞에 두고 800여평의 사역을 조성하였는데 대웅전과 향각전은 나란히 동향에 있고 그 북쪽

으로 "ㅁ자형"의 큰 요사체가 있다. 요사 뒷편에 지대를 낮추어 측간과 허드레광이 마련되고, 사역 입구에서 남쪽 둔덕 위에 삼성각이 있다. 향각전과 상성각은

근년에 세워진 반면 대웅전과 요사는 고풍스러운 목조 건물의 구조를 간직하고 있어 1891년 서봉화상에 의한 중수 기록과 걸맞은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만공선사께서 을미년(1895년)7월에 법계성을 깨닫고 오도송을 읊은 불교 성지로 유명하다.

 

▶ 만공선사(滿空禪師) (1871∼1946)

근대의 고승. 여산송씨. 속명은 도암(道巖), 법호는 만공(滿空), 월면은 법명. 전라북도 정읍출신. 신통(神通)의 아들이다. 1883년 김제 금산사에서 불상을

처음 보고 크게 감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출가를 결심하고, 공주 동학사(東鶴寺)로 출가하여 진암(眞巖) 문하에서 행자생활을 하였다. 1884년 경허(鏡虛)의

인도로 서산 천장사(天藏寺)로 가서 태허(泰虛)를 은사(恩師)로, 경허를 계사(戒師)로 삼아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고 득도하였다. 그뒤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참선에 열중하였다.

1895년 아산 봉곡사(鳳谷寺)에서 새벽에 범종을 치면서 "법계의 본성을 관찰하여야 한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라는

게송(偈頌)을 읊다가 홀연 깨달았다. 그뒤 공주 마곡사(麻谷寺) 토굴에서 보경(普鏡)과 함께 계속 수도하다가 경허로부터 "아직 진면목(眞面目)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조주(趙州)의 무자(無字) 화두를 가지고 다시 참선을 하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정진하였다.

1901년 경허와 헤어져 양산 통도사의 백운암(白雲庵)에 들러 며칠 머무르는 동안, 새벽에 "원컨대 이 종소리가 법계에 두루 퍼져 칠벽의 어둠이 모두 밝게하소서

(願此鐘聲遍法界 鐵圓幽音悉皆明)"라는 게송을 읊으면서 범종을 치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았다. 그리하여 곧 천장사로 돌아와 법열을 즐기던 중, 1904년 함경

북도 갑산으로 가던 길에 천장사에 들른 경허로부터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1905년 예산 덕숭산(德崇山)에 금대(金仙臺)을 짓고, 보임(保任)을 하는 동안 참선

을 하려는 수도승들이 찾아와 그 지도를 맡게 되었다. 1905년부터 1908년까지 3년 동안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에서의 선(禪) 지도와 1937년을 전후하여 잠시

마곡사의 주지를 맡았던 때를 제외한 대부분의 생애를 덕숭산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선을 지도하면서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현대 한국불교계에 하나의 큰 법맥

을 형성하였다.

그는 덕숭산 수덕사와 정혜사(定慧寺)·견성암(見性庵), 서산 안면도의 간월암(看月庵) 등을 크게 중창하였고, 1920년대 초에는 선학원(禪學院) 설립운동을 하였

으며, 선승들의 결사(結社)인 동시에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계(契) 모임의 성격을 지닌 선우공제회운동(禪友共濟會運動)에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마곡사 주지로 있던 1937년, 당시의 조선총독 지사가 동석한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의 31본산주지회의에 참석하여 한국불교를 일본불교화 하려는 총독부의 종교

정책방침에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그 반대의 요지는 종교가 정치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점과 한국불교가 조선총독부의 종교정책에 의하여 일본불교로 변질되어 계율이 문란해지고 한국불교의

전통과 종교적 순수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리고 "전 조선총독 미나미(南次郞)는 한국불교를 파괴시켰으므로 분명히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 이 미나미총독을 우리가 지옥에서 구제하지 않으면 누가 구하

겠는가."라고 하였다. 1941년, 서울 선학원에서 개최한 전국고승법회에 초대되어 설법하고 계율을 올바로 지키고 선을 진작시켜 한국불교의 바른 맥을 이어가자고

하였다. 이론과 사변을 철저히 배제하고 무심(無心)의 태도로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간화선법(看話禪法)을 채택하였고, 제자들에게는 항상 조주(趙州)의 무자

화두를 참구하도록 가르쳤다. 말년에는 덕숭산 상봉 가까이에 전월사(轉月舍)라는 초암을 짓고 생활을 하다가 1946년 10월 20일에 입적하였다. 나이 75세, 법랍

 62세였다. -조사열전에서-

 

 

봉곡사 전경 

 

석가탄신일 준비를 하느라 여기저기 기둥이 박혀있고 줄이 걸려 있다. 

 대웅전

 범종

 요사채

 

만공탑 

 

 

 

 

 

샘터 

 내려오는 길의 소나무 숲

 

 

  

 소나무에 피어난 특이한 버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