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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부산·울산·대구·경상

103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울기등대 (09. 07. 12)

by 柔淡 2009. 7. 16.

대왕암으로 가기위해서는 울기등대를 거쳐야 한다.

 

태백산맥이 마지막 뻗어내려 그 끝머리가 깊숙이 방어진 반도에 꼬리를 감춘 곳,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해안의 절경을 이루고 있어 “제2의 해금강”이라 불리는

울산의 끝 “울기(蔚埼)”에 등대가 건립된 것은 1906년 3월 높이 6m의 백색팔각형 등탑이 세워지면서부터이다.

조선시대 말을 기르던 목장이었던 이곳에 러·일전쟁 이후 해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인공적으로 1만 5천 그루의 해송림이 조성되었다.

그 후 등대 주변의 해송들이 자라 하늘을 감싸 안아 등대불이 보이지 않게 되자, 1987년 12월 기존 위치에서 50m를 옮겨 촛대모양의 아름다운 등대를 새로 건립하여, 동해안을 따라 항해하는 선박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대왕암공원 내에 등대가 위치하여, 등대로 가는 600m의 길섶에는 타래붓꽃, 수선화, 해당화, 해국 등 각종 야생화가 찾는 이를 반기며, 매년 4월이면 왕벚나무 터널이 만개하여 장관을 이룬다. 등대를 지나 계단을 내려서면 문무대왕의 호국영령이 서려 불그스름한 기운을 띤 대왕암이 청자빛 하늘과 코발트빛 바다를 그은

수평선 위로 살짝 돋아나면서 절경을 자아낸다.

* 최초점등일 - 1906년 3월 24일
* 구조 - 백색 8각 철근콘크리트 (24m)
* 등질 - 섬백광 10초 1섬광(FlW10s)
* 특징 - 우리나라 동해안 최초의 등대로서 울창한 송림이 우거진 울기공원내에 등대가 설치되어 있으며, 등대와 바다를 소재로 글을 쓰는 장소를 제공하는

            등대이다.

 

우리나라 등대의 역사와 유래


1876년에 이루어진 강화도조약은 우리나라를 쇄국주의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한 사건이었다. 그 뒤 개항장을 드나드는 제국주의 침략세력은

이권을 먼저 차지하려고 싸움을 벌였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용기를 얻은 일본은 개항장을 통하여 한일 양국간의 선박 왕래가 날이 갈수록 빈번해졌는데 한국 연해의 요소에

등대나 초표가 설치되지 않아 불편한 점이 많다며 등대건립을 촉구하는 외교문서를 보내온다. 또한 등대건설 위치선정을 위한 측량선 인천 도착 날짜

를 통보하니 협조원을 보내라는 독촉도 있었으며 각 항구에 출입하는 상선으로부터 징수하는 관세를 등대건설에 충용하라는 제의도 있었다.

또한 러시아 영국으로부터 비슷한 요구가 있었다.

등대의 효용성을 알고 있었지만 극심한 재정난으로 난감해 오던 우리 정부는 결국 열강의 강권에 못 이겨 1902년 인천에 해관등대국(海關 燈臺局)을

설치하고 그 해 5월부터 팔미도, 소월미도, 북장자(北長子) 등대와 백암(白岩) 등표(燈標) 건설에 착수해 1903년 6월에 이를 각각 완공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등대의 효시인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를 넘보던 열강들의 이양선(異樣船) 길잡이 역할을 해 주기 위한 바다의 이정표(里程標)로

등대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내가알고있는 1906년에 설치된 등대만 해도, 제주의 우도 등대. 인천 팔미도 등대, 울기등대 등이니 1910년 한일합방 이전에도

일본은 자기들 마음대로 필요한곳 아무데나 등대를 세웠던 것이다.

  

 

 

 

 

 등대입구

 

 

 

 

 1906년 세워진 등대

 

 

 

 1987년 세워진 등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