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광주·전라

국보, 보물 등 4,600여점이 전시되어 있는 고산유물 전시관 (09. 09. 13)

by 柔淡 2009. 10. 1.

주차장에서 내려 녹우당으로 들어가다 보면 녹우당의 기념관을 새로 짓고있다

안내판이 있는 우측에 유물관이 있다. 

 

연자방아가 놓여 있는 유물관을 들어서면 국보 제 240호인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을 비롯 보물로 지정된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이 담긴 고산의 수적관계

문서와 지정 14년 고려조 공민왕 3년(1354년) 노비문권 등 고산윤선도와 해남윤씨 들이 남긴 유물 4천6백여점이 보관되어 있다.

보물 제481호로 지정된 해남윤씨 가전고화첩은 지본수묵(紙本水墨)혹은 담채(淡彩)한 소품들을 체계 없이 조성한 것으로 크기나 소재, 기법이 다양하여

공재회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또한 보물 제 482호인 윤고산 수적관계문서는 고산의 수적(手蹟)과 고산에 관계되는 문헌을 일괄해서 지정한 것이다. 여기에는 금쇄동집고, 금쇄동기,

산중신곡이 있고 고산의 관계문서로는 은사첩, 윤고산양자예조입안문서가 있다.

보물 제483호로 지정된 노비문권은 고려시대의 노비문서로 소지(所志) 6장, 입안(立案) 2장, 모두 8장으로 된 문서로 오랜 년대를 내려오는 동안 좀이

먹어 훼손된 것을 1755년(영조20)에 다시 6장을 한 제첩으로 다시 꾸며 전가고적(傳家古跡)이라고 표제를 붙여서 간수하고 있다.

이것은 고려 공민왕 때 직장동정(直長同正)인 윤광전이 그의 아들인 소윤(少尹)의 관직을 가진 윤단학(尹丹鶴)에게 노비를 상속해주는 증서다.

문자의 내용은 이두문으로 되어있고 고대의 이문서는 송광사의 노비첩과 함께 현재 알려진 고려시대의 유일한 문서다.

이외에도 해남윤씨들이 남긴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어 그때의 영화를 느끼게 해준다.

 

 

 

공재 윤두서 (1668~1715)

고산 윤선도와 함께 녹우당 해남윤씨가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공재 윤두서(1668~1715)다. 공재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의 3재로 불렸던 문인화가로 그가 그린 자화상은 해남의 유일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공재는 숙종 19년(1693) 26세 때 진사시에 급제했으나 서인이 세력을 잡고 있던 시절이어서 벼슬을 한다거나 정치적 출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윤두서가 살던 시기는 대략 숙종 재위기간으로 조선 중기와 후기의 전환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격동을 거치면서 기존의

권위들이 무너지고 변화와 개혁에 대한 각성과 모색이 싹트던 때였다. 이러한 시기에 활동했던 윤두서 였기에 그의 그림에는 기존의 것과는 다른 새

로운 모습들이 나타난다.

윤두서는 조선 중기까지 우리 그림에 등장하는 신선이나 도사의 옷차림, 시중드는 동자의 머리모양 등 중국의 화풍에서 벗어나 ‘나물 캐는 여인’ ,

‘밭가는 풍경’ 등 기존의 산수화 풍을 벗어나 사실주의 적인 화풍을 전개한다.

그의 그림에서 ‘짚신삼기’는 휘늘어진 나무 밑에 도사가 아닌 맨상투 바람의 조선남자가 다리를 뻗고 앉아 열심히 짚을 엮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으며

이러한 풍속화는 18세기 중 · 후반에 김홍도 등에 의해 유행하게 되는 풍속화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시 산수화의 관념적 화풍 속에서 민중들의 생활상을 현실에서 끌어넣을 마음을 먹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윤두서는 조선후기 사실주의 회화를 이끈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실학적 선구자로서의 면모도 보여준다.

윤두서는 지도나 기하학을 비롯 다양한 분야에 박학했던 학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박학의 학문경향은 고산 윤선도를 비롯한 녹우당 해남윤씨가 인물들의

경향이기도 하다. 윤두서는 옥동 이서 등 출세에서 소외된 남인학자들과 절친하게 지내면서 틀에 박힌 관념을 벗어나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답하고

응용할 수 있는 학문을 두루 연구하였다.

 

윤두서는 실학자로서의 면모도 유감 없이 보여준다. 이는 해남윤씨가의 『당악문헌』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모두 널리 꿰뚫고 그 극치를 추구하였고 백가의 뭇 기술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원리와 응용을 연구하였으며, 천문은 각 지방을 두루 답사하고

밤마다 돌아다니며 관찰하여 천체의 이동현상을 살피었고, 천문을 측량하고 땅을 재는 법을 경험적으로 증명하였다. 세상에 전해오는 병서를 보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패관소설도 모두 읽어 지식을 넓히는데 도움을 얻었고 또 중국의 지도와 우리나라 지리서의 내용을 모두 간파하고 있었다.」

윤두서는 성호 이익의 형인 옥동 이서와 절친하였는데 실학자 성호이익은 윤두서의 제문을 쓰면서 ‘우리 형제는 자신이 없었지만 공의 칭찬을 듣고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하여 이익과 같은 학자가 나오는데는 윤두서와 같은 선구자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윤두서의 실학적 성향은 실학을 추구했던 당시 남인들과의 교유와 함께 윤두서의 외증손 다산 정약용에도 미치게 된다. 정약용은 외가인 이곳 녹우당과의

교류를 통해 그의 학문적 성과를 집대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보고있으며 정약용의 제자 중 절반이 해남 윤씨로 그의 학문을 완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

윤두서는 사람이나 동물을 그릴 때는 대상을 명확히 파악할 때까지 면밀히 관찰했으며 그림을 그린 후에 대상의 본 모습이 표현되지 않았다고 생각되면

버렸다고 한다. 윤두서의 사실주의 적 기법은 자화상에 잘 나타난다. 자화상은 그림의 양식에서도 전무후무한 묘사의 기법을 쓰고있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강렬한 눈빛은 그의 내면을 잘 담고 있다.

윤두서는 또한 말을 즐겨 그리기도 하였다. 그의 그림 중에 ‘백마도’를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의 포즈를 취하고 있는 많은 말 그림이 현존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그의 자화상과 함께 한국 회화사상 손꼽히는 명작으로 평가되는 ‘노승도’ 그리고 ‘심득경 초상화’가 있다. 심득경은 윤선도의

외증손이며 윤두서와 절친한 지기로 지냈으나 먼저 죽었다. 윤두서가 그의 초상을 그려서 보내니 그 집안 사람이 살아온 것 같아 모두 울었다 한다.

서울에 집을 두고 생활하던 윤두서는 46세 때 (1713년) 서울 생활을 버리고 해남으로 돌아왔고 2년 후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원래 내부는 사진을 찍을수 없는데 특별히 허릭을 받아 사진을 찍을수 있었다.

 

 

 

 

 

 

 

 

 

 

 

 

 

 

 

 

 

 

 

 

 

 2009명량대첩축제가 09년10월9일 금요일부터 10월11일 일요일까지 해남군 우수영관광지와 진도군 녹진관광지 일원에서 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