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벗이 몇이냐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것이 또한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중 첫수
水國(수국)이 가을이드니 고기마다 살져있다
萬頃澄波(만경딩파)의 슬카지 容與하쟈
술취코 人間(인간)을 도라보니 머도록 더욱죠타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중 가을
내가 35~6년전 열심히 외웠던 고산 윤선도의 시조들이다.
고산의 혼이 서려있는 녹우당을 찾아가는길, 이 시조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녹우당은 사실 해남에 올때 가장 보고싶던 곳이다. 해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곳.
녹우당을 돌아보기전 먼저 고산 윤선도에대해 알아보자
고산 윤선도 (1587~1671)
시조문학의 최고봉
고산 윤선도는 우리나라 국문학상 시조시인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송강이 가사문학의 대가라면 고산은 시조문학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우리나라의
선비들이 대부분 한문문학과 경직된 사회구조의 틀 속에 갇혀 있을 때 고산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려 섬세하고 미려한 시조들을 지어냈다.
고산의 생애는 한마디로 유배와 은둔의 생활이 거듭된 굴곡 많은 삶으로 그는 이러한 자신의 삶과 시름과 흥, 원(願)을 시문(詩文)으로 풀어낸다. 고산은
본관이 해남으로 1587년(선조20) 6월 22일 한성부 동부 현 서울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아버지 유심과 어머니 순흥안씨의 2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고산(孤山)또는 해옹(海翁), 자는 약이(約而)다. 고산은 해남종가에 아들이 없자 8세 때 작은 아버지 유기의 양자로 입양돼 해남윤씨의 대종(大宗)을
잇는다.
고산의 일생은 당시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의 한사람으로서 이러한 정치적인 역학관계로 인해 관직에 있던 기간은 얼마 되지 않고 대부분 중앙정계와
멀리 떨어진 궁벽한 곳에서 보내게 된다. 또한 그는 천성적으로 강직하고 곧은 성격을 지녀 부당함을 보면 자신의 주장을 감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순탄한
일생을 살지 못했다.
고산은 26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지만 당시는 광해군이 다스리던 시기로 당시는 이이첨 등 북인들이 득세하여 남인이었던 고산은 이러한 세력다툼 속에서
힘을 펴지 못 하였으며 광해군에 아첨하는 권세가 들의 횡포가 극에 달한 시기였다.
이때 고산은 이이첨 일파의 불의를 비난한 병진상소를 올렸다가 광해군 주변의 간신들의 모함으로 함경도 경원으로 첫 유배를 당한다. 그리고 다음해엔
경상도 기장으로 이배 돼 6년 동안 귀양살이를 한다. 그 후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유배에서 풀려나 의금부도사에 제수 되지만 유배후의 심정이
정리되지 않아 곧 사직하고 이곳 해남으로 돌아온다. 그는 이곳에서 유배의 아픔을 달래며 두문불출 은둔생활에 젖는다.
고산은 42세가 되었을 때 출사의 꿈이 펴진다. 별시초시에 장원급제하고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를 거쳐 7년간 요직을 두루 거치며 정치적 경륜을
쌓는다. 그러나 48세에 성산(지금 경북 성주군)현감으로 좌천되고 경세의 뜻이 좌절되자 다음해 현감직을 사임하고 해남으로 다시 귀향한다.
1636년(인조14) 고산의 나이 50세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애국의 정이 깊었던 고산은 향리자제와 가졸 등 수백명의 의병을 이끌고 선편으로 강화도까지 간다.
그러나 이미 왕자들은 붙잡히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화의를 맺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을 개탄 평생 초야에 묻혀 살 것을 결심하고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한다.
이때 배를 타고 남하하다 도착한 곳이 ‘어부사시사’의 배경이 된 완도의 보길도다. 그는 이곳에서 산이 사방으로 둘러있어 바다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샘과 돌이
참으로 아름다와 ‘물외(物外)의 가경(佳境)’이라고 감탄하며 머물게된다.
이곳에서 고산은 격자봉 아래에 은거지를 정하고 이곳을 부용동이라 이름지었으며 낙서재를 세우고 자연에 묻혀 어부사시사를 짓는 등 작품생활을 하는 생활의
터가 되며 임종시 그가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 땅이 된다.
고산의 시련은 말년에까지 이어진다. 그는 74세 때 승하한 효종의 산릉과 조대비의 복제 문제로 서인과 대립하다 기년복을 주장하는 서인과 3년복을 주장하는
남인과의 논쟁에 있어 3년복이 옳다고 강경히 주장하는 고산의 말에 과격함이 있다하여 송시열 등 반대파에 의해 사형이 주장된다. 그러나 고산은 바른말하는
선비요 또 선왕의 사부니 경솔히 죽일 수 없다는 상소가 받아들여져 함경도 삼수로 유배된다.
고산은 79세(1665년 현종6)에 광양으로 이배 되고 81세에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7년 4개월의 긴긴 세월을 다시 유배생활로 보내게 된다. 그는 유배에서 풀려
난 뒤 1671년 6월 11일 보길도 낙서재에서 향년 85세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한다.
고산은 관직에 있던 기간에 비해 유배와 은둔의 생활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음을 알 수 있다. 관직에 있던 기간에 비해 유배와 은둔의 생활의 생이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시련과 극복’ ‘득의와 풍류’ ‘고난과 개척’으로 교차된 삶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고산은 정치적으로 불우했지만 문학적으로 매우 뜻깊은
시대를 살다간 시인이다.
그래서 그를 평가하는 가장 큰 부분은 문학이다. 이러한 그가 평생을 통해 쏟아낸 엄청난 시구로 인해 한국의 국문학사는 커다란 분수령을 이룬다. 윤선도는
그의 창작산실이 거의 유배, 은둔지였던 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들은 공간적인 배경을 비롯 그 공간에서 처하게 된 동기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고산이 택한 은거지는 크게 현산면 금쇄동과 완도 보길도였다. 현산은 첩첩산중 육로를 거쳐 찾아야 할 산수자연이요 보길도는 배를 타고 찾아가야 할
해중자연이라는 점에서 서로 대조되는 삶의 공간이 된다.
해남에서 문학생활의 주무대는 현산면 만안리에 있는 금쇄동과 수정동, 문소동으로 이곳에서 약 10년을 번갈아 머물며 ‘산중신곡’ ‘금쇄동기’등의 작품을
쏟아냈고 보길도의 부용동에서는 일곱차례에 걸쳐 약 12년간을 풍류하며 살았다.
녹우당 소개
소재지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82번지 일대
이 곳은 조선조의 문신(文臣)이요, 국문학상 대표적인 시조시인으로 일컫는 윤선도尹善道(1587-1671) 선생의 유적지(遺蹟地)이다. 선생의 자(字)는
약이(約而), 호(號)는 고산(孤山)또는 해옹(海翁)이다.
선생은 광해(光海)4년(1612)에 진사(進士)되고, 4년후 성균관유생(成均館儒生)으로서 권신(權臣)의 횡포를 지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벽지에 유배되었다.
광해 15년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자 석방되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에 취임하였으나 곧 사직하고 이곳 향리(鄕里)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인조6년(1628) 별시문과(別試文科)의 초시( 初試) 에 장원한 후 봉림(鳳林)과 인평(麟坪)을 모시는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고 한성서윤(漢城庶尹)과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역임하는 등 수차에 걸쳐 나라에 중용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후에는 주로 완도(莞島)의 보길도(甫吉島)와 해남(海南)의
수정동(水晶洞) 및 금쇄동(金鎖洞)에 은거하여 자연에 들어 원림(苑林)을 경영하고 산중신곡(山中新曲)과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등 불후(不朽)의
명작을 이루어 조경문화(造景文化) 및 국문학(國文學)의 발전에 큰 공을 남겼다. 그 사이 효종(孝宗)의 부름으로 벼슬에도 나아갔으나 당쟁으로 다시
유배당하는 등 많은 파란을 겪다가 현종(顯宗) 12년에 85세로 졸(卒)하였는데 숙종(肅宗)원년에 신원되어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종되고 시호를
충헌(忠憲)이라 하였다.
이곳 유적지에는 선생이 시문에 열중하던 해남윤씨어초은공파(海南尹氏漁樵隱公派) 종가(宗家)의 고택(古宅)과 녹우당(綠雨堂)(사적 제167호), 그리고
그의 선조 어초은사당(漁樵隱祠堂) 외에 고산사당(孤山祠堂) 및 추원당(追遠堂)이 있고 유물전시관(遺物展示館)에는 윤공재자화상(尹恭齋自畵像)
(국보 제240호)을 비롯하여 해남윤씨가전고화첩(海南尹氏家傳古畵帖) (보물 제 481호), 윤고산수적관계문서(尹孤山手蹟關係文書)(보물 제 482호)
지정(至正) 14년 노비문서(奴婢文書)(보물 제 483호) 등 소중한 유물이 있다. 뒷산 중로에 있는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제 241호)은 약 500년전 선생의
선조가 이루어 놓은 수림(樹林)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 촬영 장소
- 영화제목 : 불꽃처럼 나비처럼
- 촬영장소 : 녹우당 후원, 추원당, 돌담길 등 고산유적지 일원
- 촬영시기 : 2008년 7월
- 영화제작사 : (주)싸이더스FNH(타짜, 살인의 추억, 혈의 누 등)
- 개봉시기 : 2009년
- 감독 : 김용균
- 분홍신 : 공포/2005/김혜수,김성수
- 와니와 준하 : 로맨스/2001/김희선,주진모
- 주연배우 : 수애(명성황후 자영 역) / 조승우(호위무사 무명 역)
- 영화 줄거리 : 조선말기 급변하는 정세속에서 나라를 지키려는 명성황후와 그를 사랑한 호위무사 “무명”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로 작가 야설록의
- 대하소설 "불꽃처럼 나비처럼"원작을 각색한 작품
녹우당 지역에 들어서면 제일먼저 500년된 은행나무가 눈에 띈다.
녹우당도 이 은행나무 잎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가 비오는 것과 같다하여 녹우당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해남문화관광 해설사 전희숙님이 해설을 해주시고
각종 안내판들이 서있다.
녹우당 입구
녹우당의 큰 건물들은 독특하게 2층처마이다.
녹우당은 고산이 수원에 있을 당시 효종이 고산에게 하사한 집으로 고산 윤선도는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었다. 녹우당은 고산이 82세 되던
1669년 뱃길로 옮겨와 다시 지었다.
원래 호남지역 양반집의 건축양식은 ‘ㄷ’ 자이거나 ‘ㅡ’자 집이나 녹우당은 서울이나 중부지방 양반가와 같은 구조인 ‘ㅁ’자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때 아흔 아홉 칸에 달하던 녹우당 고택은 현재 55칸 정도만 남아 있다.
녹우당은 우리나라 사대부 양반가의 고택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녹우당 하면 고택 전체를 뜻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하나, 녹우당은
이 집의 사랑채를 말한다. 이 건물이 들어섬으로 인해 전체적인 모습도 지금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 졌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사랑채 현판으로 걸려있는 ‘녹우당(綠雨堂)’이라는 당호는 고산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와 절친했던 옥동 이서가 ‘녹우당’이라는 현판을
써준 것으로 이때부터 이집의 공식적인 명칭이 됐다. 옥동 이서는 집 앞의 푸른 은행나무 잎이 비처럼 쏟아지는 것을 보고 녹우당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이곳 녹우당은 조선후기 공재 윤두서의 학문과 예술의 토대가 될 뿐만 아니라 다산 정약용, 소치 허유 등 쟁쟁한 문인예술가들이 머물거나
교류한 곳이 되어 해남의 문예부흥이 이곳 녹우당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녹우당의 역사는 고산 윤선도의 4대조이자 해남윤씨 어초은파의 시조가 된 어초은 윤효정(尹孝貞, 1476~1543)이 백연동에 자리를 잡으면서
부터 시작된다.
이때부터 시작된 이 집의 역사와 건축형태는 지금까지 장구한 시간의 흐름속에서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거나 중건을 하고 또 보수 등을 거듭
하면서 오랜 세월을 이어와 지금의 녹우당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처음의 건물 역사에 대한 문헌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어초은이 연동에 들어온 시기로 보아 대략 15세기 중기에 지어져 지금까지
이어온 것으로 보고있다.
현재 녹우당의 영역 속에 있는 주 건물로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헛간, 그리고 안사당, 어초은 사당, 고산사당과 좌측 숲 속에 자리잡고 있는
어초은 추원당(追遠堂)이 있다. 또한 이외에도 고산서원과 후원에 별당채도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이곳 녹우당의 고산 사당은 영조 3년(1727년)에 불천지위(不遷之位)로 지정되어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사당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불천지위는 보통 국가의 공이 인정될 때 불천지위로 지정되어 모시게 된다.
따라서 이곳은 입향조인 어초은공과 불천지위인 윤고산의 사당을 따로 지었다. 그리고 집안 동쪽에 사대조를 받드는 안사당이 있다. 현존 5대
봉사를 하고 있는 안사당은 순종21년(1821)에 세웠으며 그 1년 뒤인 순조 22년(1822)에는 어초은 사당을 중수하였다.
회화나무
고산 사당
1727년 영조3년에 불천지위로 지정되어 집밖에 따로 모셔져 있다.
불천지위는 안사당에서 4대까지 모시고 묘로 가는 대신 영구히 모실수 있게 하고 있는데 보통 국가에서 공이 인정될때 불천지위로 지정된다.
매년 음력 6월11일 이곳에서 고산에 대한 기제사를 지낸다.
추원당으로 가는길의 돌담과 대숲
고산시비. 어부사시사가 적혀있다.
녹우당에 들어가기전 주차장 입구에 연못이 있다.
덕음산을 뒤로하고 그 줄기인 성매산, 옥녀봉, 호산을 잇고 들어서 있는 연동은 흔히 풍수지리의 산서(山書)에서 말하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잘 짜여진
최고의 명당자리로 손꼽히고 있다. 이 터는 고산의 4대조인 어초은 윤효정이 잡았다고 하며 현재 고산 윤선도의 14대손인 종손 윤형식씨가 살고 있다.
녹우당이 있는 연동 마을은 예전에 연못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인공적으로 조영한 연못이 있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백연동(白蓮洞)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연동이라 부르고 있다.
담양의 명옥헌으로 들어가는 마을입구에도 이와 비슷한 연못이 하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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