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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고궁,사찰,기타)

일제의 수난을 딛고 다시 제모습을 찾고있는 창경궁 (02. 01)

by 柔淡 2010. 2. 24.

한시간 정도 종묘관람을 마치고 육교로 연결된 창경궁으로 들어간다.

창경궁은 조선의 4대궁궐중에서도 역사상 가장 수난이 많았고 2006년에는 방화사건이 있었던 궁궐이기도 하다.

 

창경궁은 원래 1418년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는 수강궁(壽康宮)이 있던 곳이다.[1] 성종 14년(1483년)에

대왕대비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를 모시기 위하여 수강궁을 확장하여

세운 별궁이 바로 창경궁이다.[1]

성종 때에는 정전인 명정전(明政殿), 편전인 문정전(文政殿), 침전인 수령전(壽寧殿), 그리고 환경전(歡慶殿), 경춘전(景春殿), 인양전

(仁陽殿), 통명전(通明殿), 양화당(養和堂), 여휘당(麗暉堂), 사성각(思誠閣) 등이 건립되었으며, 궁의 둘레는 4,325척이었다.[1]

창경궁은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버렸는데, 광해군 7년(1615년) 4월에 주요 건물들을 재건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11월에 마무리되었다.[1]

창경궁 재건보다 7년 앞서 창덕궁이 먼저 재건되어 법궁이 됨에 따라 창경궁은 조선 전기에는 그다지 활용되지 않았으나, 창덕궁과

인접한 관계로 조선 왕조 역사의 중요한 무대로 활용되는 기회가 많아졌다.[1] 창경궁은 잦은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재건되기를

반복하였는데, 인조 때와 순조 때에 큰 화재가 일어났다.[1] 이처럼 창경궁에는 화재로 건물의 변화가 생기고 여러 사건도 일어났다.[1]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하고 나서 급속히 변형되기 시작하여 일제 강점기에 결정적으로 훼손되었다.[3] 1909년 일본 제국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마음을 달랜다는 이유로 강제로 창경궁 내부 궁문, 담장, 많은 전각들을 훼손하고 궁 안에 일본식 건물을 세우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유원지로 조성하였다.[4] [2]

권농장 자리에는 연못을 파서 춘당지라 불렀으며, 연못가에 정자를 짓고 궁원을 일본식으로 바꾸었다.[3] 그 뒤쪽에는 식물관을 짓고,

동쪽에는 배양당을 지었으며, 통명전 뒤 언덕에는 일본식 건물을 세워 박물관 본관으로 삼았다.[3] 또한 일제는 남아있는 건물들도 개조

하여 박물관의 진열실로 만들었다.[3] 1911년에는 자경전터에 2층 규모의 박물관을 세우고 창경궁의 명칭으로 창경원으로 바꾸어 격하

하였으며, 1912년에는 창경궁과 종묘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절단하고 도로를 내어 주변 환경을 파괴하였다.[3] 1915년에는 문정전 남서쪽

언덕 위에 장서각을 건립하였고, 1922년에는 벚꽃을 수천 그루 심어 벚꽃밭을 만드는가 하면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열었다.[3]

 

창경궁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 동ㆍ식물원으로 쓰이다가 1981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이 결정되면서 원형을 되찾기 시작

하였다.[3] 1983년 12월 31일자로 공개 관람이 폐지되고 명칭도 창경원에서 다시 창경궁으로 회복되었으며,[3] 이듬해인 1984년 1월

수정궁의 철거를 시작으로 6월에는 동물 사육장을 폐쇄한 뒤 서울대공원으로 이관하였다.[5]

1986년 8월까지 동물원과 식물원 관련 시설 및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없어졌던 명정전에서 명정문 사이 좌우 회랑과 문정전을 옛 모습

대로 회복하여 1986년 8월 23일 일반에 공개하였다.[5]

 

명정전 

 

 

 

 

 

 

 

 홍화문

 

 숭문당

 화계

 

 문정전

 종묘쪽에서 들어오면 보이는 풍경

 함인정

 창덕궁쪽 화계

 환경전

 7층석탑

 경춘전

 양화당

 통명전

 

 

 

 

 

 

 영춘헌과 집복헌

 

 

 성종의 태실

 춘당지

 8각7층석탑

 대온실

 

 

 흰소나무. 백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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