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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강원

[강원강릉] 300년 역사, 한국최고의 전통가옥 선교장 1

by 柔淡 2010. 4. 29.

경포대를 돌아보고 다시 강릉시내로 나오는길, 아까 경포대로 들어갈때 보이던 벚꽃이 활짝 피어있고 노송이 우거진

대 저택이 보인다. 갖고있던 관광지도를 보니 저기가 선교장이다.

 

강릉엔 1년에 몇차례씩 지나다니거나 머무르거나 했는데 정작 지끔가지 선교장이나 오죽헌에는 일부러 시간내어

들려본적이 없엇다. 그래서 오늘은 선교장과 오죽헌을 돌아보기로 했다.

 

선교장 (문화재청 홈피 인용)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1대손인 무경 이내번(茂卿 李乃蕃)이 명기(名基)를 얻어 개기(開基)한 이래
누대(累代)가 세거(世居)하였는데 가전(家傳)하는 바에 따르면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은 순조(純祖)15년(1815)에 오은거사 이후
(鰲隱居士 李厚)가 건립하고 연지(蓮池)의 활래정(活來亭)은 순조 16년(1816)에 이근우(李根宇)가 조영하였다고 한다.
 6·25때 일부 피해를 입었으나 이후 복구하여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

강릉에서 경포대로 나가자면 왼편 산기슭에 큼직한 집이 보인다. 새로지은 건물인데 그 집을 목표로 삼고 다가가면 형국이 짜여진 명기
(名基)가 나서고 거기에 장대한 규모를 갖춘 선교장(船橋莊)이 있음을 알게된다. 어구(於口)에 들어서면 우측에 연지가 있다.
지중(池中)에 당주(當洲)가 있고 잘생긴 소나무가 섰다. 그 건너편으로 지반(池畔)에 세운 한쌍의 정자가 보인다. 활래정이다.
잘자란 소나무 숲이 정자의 배경이 된다.

길을 따라 더 들어가면 좌측으로 능선이 에워싼 터전이 열리는데 거기에 농경(農耕)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초즙(草葺)의 소옥(小屋)들이
있다. 다시 더 들어가다 문득 바라다 보면 나지막한 배산(背山)아래 양명(陽明)한 터를 골라 개기(開基)하였는데 장대한 바깥 행랑채가
눈을 끈다. 그 중간 쯤에 솟을대문이 열렸다. 대문과 행랑채는 높직이 쌓은 석대(石臺)위에 자리잡고 있다.
대문 앞쪽으로 경사가 급한 답도(踏道)가 대문폭만큼의 넓이로 축조되어 있다.
수레나 사인교(四人轎)등의 출입을 쉽게 하기 위하여 층층다리 대신에 설치한 것이다.

내정(內庭)에 들어서면 맞은편에 가로막는 건물이 있다. 안채의 서쪽편에 있는ㄷ형 평면의 서별당이다. 안채는 이집 보다 높은 기단 위에
자리잡고 있다. 넓은 대청을 중심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을 배설(排設)한 당당한 규모의 건물이다. 안채의 동편에 동별당(東別堂)이 있는데,
안채보다 한단 낮은 위치에 있다. 역시 대청이 중심에 있는 배치법을 응용하였는데 ㄱ자형의 평면이다. 이들은 안채의 일곽이 된다.
행랑채와의 사이에 있는 샛담의 일각문을 나서야 서쪽편의 사랑채 쪽으로 갈 수 있다.

사랑채인 열화당은 앞쪽에 동판(銅板)을 너와처럼 이은 차양 시설이 있어서 주목된다. 세벌대 높은 댓돌 위에 있어서 층층다리를 올라서야
들어서게 된다. 一자형이나 겹집형태의 평면이다. 강원도다운 특색을 보이는 구성이다. 그러나 사랑채답게 넓은 대청을 강조하는 구조로
완성하였다. 넓은 평면에서 방은 3칸일뿐 나머지는 모두 판상(板床)이고 그중 1칸은 내루(內樓)처럼 갖추어졌다.

이 집에는 소장하고 있는 여러 살림살이들이 있어서 옛날 제택(第宅)에 사는 이들의 생활 관습과 금도(襟度)를 알아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전경 

 

 물레야 물레랴 라는 영화를 찍은곳이다.

 활래정

 부속건물 홍예헌 1, 2관

 본채 정문

 외별당

 현재는 후손들의 살림집으로 활용하는것 같다.

 

 사당

 

동별당 내부

 

 

 동별당

 

 

 안채주옥

 

 

 

 선교장에서 바라본 강릉시내쪽. 전경이 확 트여있다.

예전에는 선교장 앞에도 경포호였다고 한다.

 

 서별당

 

 

 연지당

 

 

 

 서별당

 

 

 행랑채

 2부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