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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충남부여] 수수하고 순박한 시골처녀 같은 느낌, 천년고찰 만수산 무량사

by 柔淡 2010. 5. 13.

지난주 주중에는 제주엘 2박3일 다녀왔고 주말에 부여로 1박2일을 다녀와서 포스팅 할것이 많이 밀려있다.

여행후에 시간이 많이 지나면 여행때의 느낌이 많이 사라지기에 가능한한 빨리 포스팅하려고 하는데

이리저리 바쁘다 보니 자꾸 밀리게 된다.

조금의 느낌이라도 남아있을때 부여를 먼저 포스팅하고 제주의 나머지를 포스팅 해야겠다.

 

군생활을 25년하면서 계룡대와 대전, 충남에만 10여년을 살앗다.

우리부부는 역마살이 끼어서 주말에 많이 돌아다니는 편이었고 대전, 충남일대도 많이 다녔는데

부여의 무량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무량사를 처음 보았을때 수수하고 순박한 시골처녀 같은 느낌을 받았다.

요즈음 대부분의 사찰이 큰 불사를 일으켜서 분바르고 회칠하고 해서 사찰본래의 느낌을 많이 잃어

버렸는데 무량사는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는것 같다.

그런데 이곳에 중요한 보물과 문화재가 여러개 있다니 더욱 더 사랑스럽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옛 문헌에는 홍산(鴻山) 무량사라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무량사가

위치한 지역이 행정구역으로 부여군 외산면(外山面)에 해당되어 외산 무량사라 불리고 있다. 절에 대한 연혁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에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조선 세조 때 김시습이 세상을 피해 은둔생활을 하다가

죽은 곳으로 유명하다.

고려 초기에 개창되었지만 임진왜란 때 병화에 의해 사찰 전체가 불타버린 뒤 조선 인조 때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극락전(보물 제356호)·5층석탑(보물 제185호)·석등(보물 제233호) 등이 있으며 이밖에도 당간지주와 김시습의 부도가

남아 있다.

무량사의 보물인 극락전, 5층석탑, 석등 

전각배치도 

 

 

 일주문

 

 극락교. 극락교를 건너면 불국토인 피안의 세계가 있을것만 같다.

계절의 여왕 5월의 짙푸른 신록이 정말 아름답다.

 

 사천왕문

 당간지주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는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의 양쪽에 서서 이를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드물게 당간이 있으나 대부분 두 기둥만 남아 있다. 이 당간지주는 무량사 천왕문 동쪽에 남아 있는 것으로, 두 개의 길다란 돌기둥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기둥 끝은 안쪽면에서 바깥쪽으로 둥글게 다듬었고, 앞뒷면의 가장자리에는 테두리 선을 돌렸으며, 양 옆면

가운데에는 세로로 돌출된 띠를 새겼다.

마주보는 기둥의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2개의 구멍을 각각 뚫어 놓았다. 돌기둥 사이에는 당간 받침돌이 끼워져 있는데,

그 중앙에 당간을 받치는 기둥자리를 파고 그 주위를 둥글고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통일신라시대에서 굳어진 제작방식을 따라 고려 전기에 만든 것으로 짐작된다.

 

 범종각.범종은 충남 유형문화재 162호다.

 심검당. 요사채

 석등, 5층석탑, 극락전 세개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석등 (보물 제233호)

선이나 비례가 매우 아름다운 석등이다.
상대석과 하대석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 팔각 화사석을 갖추고 있는 점 등이 통일 신라 이래 우리 나라 석등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춘 고려 초기 석등이다. 상대석이 좀좁은 편이지만 기둥돌이 짧은 편이므로 오히려 그 덕에 전체적으로 둔중하지

않게 되었다. 또 팔각 화사석은, 네 군데로 난 화창은 넓고 그 나머지 면은 좁으나 그렇게 어색하지 않다.

팔각 지붕돌의, 좀 큰 듯한 추녀선도 탑에 견주어서는 매우 경쾌하다. 지붕돌 위에는 연봉오리 모양의 보주로 단정하게 마무리했다.

높이 2.5m로 탑과 비례를 잘 이루는 것으로 보아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극락전 (보물 제356호)

무량사의 본전에 걸맞게 전각 명칭이 극락전이다. 곧 하나같이 다 이 절집이 극락세계임을 뜻하는 이름들이다. 무량사는 임진왜란 때

크게 불탄 뒤 인조 때에 중창하였으니 이 극락전도 그때에 지은 것으로, 조선 중기 건축의 장중한 맛을 잘 드러내 주어 보물 제356호로

지정되었다.

먼저 겉에서 보기에 2층집인 점이 우리 나라 여느 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모습을 하고 있어 독특하다. 이러한 예는 오층 목탑 형식인 법주사

팔상전이나 3층 전각인 금산사 미륵전 말고는 화엄사 각황전 등에서나 볼 수 있으며 가까이에는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이 있다.

이처럼 손에 꼽을 정도인데, 그 집들 모두가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까지 뚫린 통층(通層)인 점이 공통된다. 따라서 이런 2층을 올린 것은

기능보다는 위엄과 장엄에 그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래층은 앞에서 바라보아 5칸, 옆에서는 4칸이며 위층은 정면이 3칸, 옆면이 2칸으로 되어 있다. 아래층 문살은 가운데가 네 짝이고 점차

두 짝, 한 짝씩으로 줄었다. 칸살이 넓어 전체적으로 집이 평활해 보인다. 정면은 모두 창살문을 달았으며 2층 정면도 지금은 판자벽이지만

원래는 살문을 달아 집안에 빛이 잘 들어오도록 했던 듯하다. 다른 벽들은 모두 흙벽[土壁]이 아니고 나무판자를 대서 만든 판벽(板壁)이다.

이런 점은 평지가 아닌 산간에서나 볼 수 있는 독특한 보기이다.

극락전 안에는 또 1627년에 그린 괘불이 보관되어 있다. 연대와 함께 혜윤, 인학, 희상이라고, 그린 스님들의 이름도 적혀 있어 귀중한 자료

이기도 하다. 세로 12m, 가로 6.9m의 큰 모시천에 그린 이 괘불은 가운데 모신 미륵보살의 광배를, 16화불들이 춤추듯이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매우 아름답다. 미륵보살은 연꽃대좌 위에서 두 손에 연꽃을 들고 서 있으며, 녹색과 적색의 보색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우리 나라

전래 색감을 보여 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괘불은 사월초파일이나 다른 재(齋)를 올릴 때에 절 마당에 내어 거니 그때 볼 수 있다.

불전 안에는 가운데에 아미타불(5.4m)이, 양쪽에 관세음보살(4.8m)과 대세지보살(4.8m)이 있는데, 이 아미타삼존불은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불로서는 동양 최대의 규모를 자랑한다. 어깨는 당당하나 상호가 사실성 없이 평판적이며 옷주름 등은 도식성을 보여, 단순해져 가는

조선 후기의 양식을 보여 준다. 본존불의 손이 매우 큰데 한 손은 올리고 한 손은 무릎에 내린 채 양쪽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구품인 중에서 중품중생인을 나타내고 있다. 보살상은 전대에 견주어 영락 장식은 줄어든 편이나 보관이 매우 화려해지는 모습이

또한 조선 후기 불상의 특성을 내보이고 있다. 불상의 복장 유물에서 발원문이 나와 이 불상이 1633년에 흙으로 빚은 아미타불임이 분명히

밝혀졌으므로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예가 되었으며, 아울러 극락전 건물도 같은 시기에 지었을 것으로 짐작하게 되었다.

 우화궁

 원통전

 산신각, 청한당

 청한당

 만수산은 그리 높지 앟은 산인데 주변산이 온통 초록에 둘러쌓이고 작은 폭포까지 흘러 강원도의 심산유곡에 와 있는것 같다.

 원통전

 영산전

 오층석탑 (보물 제185호)

오층석탑을 마주하면 매우 장중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지막한 2층 기단 위에 매우 안정된 비례로 5층을 올렸는데, 밑변 5.2m의 널찍한

기단 위에 7.5m 높이로 올린 탑이라 안정감을 준다. 그러면서도 층층이 쌓아올린 적당한 체감으로 불안하지 않은 상승감도 갖추고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앙화가 소박한 형태로 얹혀 있어 탑이 무거워지지 않고 깔끔한 마무리가 되게 하는 것에 한몫 한다.

한편 너비는 넓고 기울기는 평평하다시피 완만한 지붕돌이라든지 목조건물처럼 살짝 반전을 이루어 경박하지 않은 경쾌함을 보여주는 처마선

등은 부여 정림사터 탑을 그대로 빼닮았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이 탑 역시 고려 시대에 조성된 백제계 석탑으로 손꼽는다.

그런가 하면 지붕돌 처마 밑에는 빗물이 탑 속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절수구(切水溝)를 파놓아 세심한 배려를 볼 수 있다. 이런 수법은 신라 말

고려 초기에 조성된 탑들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또 특징적인 것은 기단부의 면석받침과 갑석의 부연이다.

흔히 정연하게 깎은 돌을 놓게 마련이나 이 탑만은 전체적으로 돌아가며 모를 죽이고 반원형으로 부드럽게 공글려서 백제계 석탑의 부드러움을

한층 더 맛볼 수 있다.

보물 제185호인 이 탑에서 1971년에 탑을 보수할 때 5층 몸돌에서 청동합 속에 든 수정병, 다라니경, 자단목, 향가루와 사리 등 사리장치가 나오고

1층 몸돌에서는 남쪽을 향하여 있는 고려시대의 금동아미타삼존불이 나왔다.

 

 무량사 주지스님이 명찰 순례객들에게 직접 사찰을 소개하고 있다

 

國內 三代佛殿 아미타 제일도량 무량사
아미타 기도 도량 무량사는 신라 문성왕(서기839-856)때 범일국사(810-889)께서 창건하셨으며, 국가지정 보물 6점과
지방문화재 7점 향토유적 3점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에 준하는 다량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사찰입니다.
또한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이 입적한 곳이로도 유명하며, 영정각에 모셔져 있는 초상화는 자화상 이며 매월당 김시습의
부도탑이 있는 유적지로서 많은 분들이 찾고 있으며, 백제 불교의 역사와 혼이 듬뿍 담겨있는 곳입니다.
극락전은 우리나라 3대 불전으로 유명하며 주불은 아미타 부처님이시며 그 높이가 5 미터 40센치나 되는 동양 최대 좌불상 입니다.
천년고찰 무량사는 우리 고유 문화유산을 두루 소장하고 있기에 많은분들이 관심과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언제나 많은 신도님들의 기도가 끊이지 않고 있으며 특히 아미타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도량으로 유명하여 그래서 오늘도 많은 불자님들이 오셔서 기도 정진을 하는 곳 입니다.

  명부전

명부전 내부의 불상

 5월의 신록이 푸르르다.

 

 

 

 

 

 

 일주문 뒤쪽은 광명문이라고 새겨져 있다.

 

 오랫만에 소박하고 운치잇는 절집을 보고나니 마음마저 상쾌히 진다.

무량사가 계속 이상태를 유지하며 아미타 기도도량으로 역할을 다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