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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부산·울산·대구·경상

[경북영천]백로가, 단심가의 주인공 포은 정몽주를 모신 임고서원

by 柔淡 2010. 8. 30.

백로가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세울세라

청강에 조히 씻은몸 더럽힐가 하노라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중학교때인가 배웠던 시조인데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니 꽤나 유명하고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불사이군은 유교적인 사고방식으로 현재의 개념으로는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한 왕조을 섬긴다는게 그리 익숙해 보이지는 않지만

민주화된 요즈음에도 정권이 바뀔때마다 변신하여 살아남는 사람들을 보는것도 그리 유쾌하지는 않다.

 

서서히 망해가는 고려의 잔해를 부여잡고 선죽교에서 피 흘리며 죽어간 정몽주를 정작 그를 죽이라고 지시했던 이방원,

나중에 조선 태종이 그의 정신을 높이사서 영의정으로 추증했던 모양이다.

 

그런 정몽주의 정신을 높이받드는 서원이 영천 임고면에 있다.

 

임고서원은 위기에 처한 나라의 국운을 바로 세우고자 죽음으로서 절의를 지킨 시대의 충신 '정몽주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조선명종 8년(1553)에 선생의 고향인 영천 사람들이 건립한 이후 소실과 중건, 정화를 거친 뒤에야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임고서원 소장전적 및 포은 정몽주 영정이 보물 제1109호, 111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원 앞에는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가 우람하게 서있다.

 

 

높이 약 20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가 5.95m에 이르는 포은 정몽주 임고서원 앞 거대한 은행나무는 수령 약 500년의 노거수이다 .

정성껏 차린 음식이나 맑은 정화수를 갖다 놓고 성의껏 기도드리면 부녀자는 생남하고 병자는 소생하나, 나무에 해를 주는 자는

크게 벌을 받는다는 전설이 있다.

 임고서원을 영천의 정신적인 지주로 삼고자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심진각. 포은의영정과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다.

 

 

정몽주는 고려 말기 무신 세력의 몰락과 함께 세를 얻어가던 신진 사대부 세력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고려에 새로 도입된 성리학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학자 관료들의 지도자로서 높은 학식으로도 존경을 얻고 있었다. 무력을 바탕으로 부패한 고려 조정을 뒤엎으려 한 이성계와 손잡고

고려 말 정치를 좌지우지 하였으나 고려 사회의 체제를 지키려 한 정몽주와 역성혁명을 도모하던 이성계는 궁극적인 목표가 서로 달라 결국은

사이가 틀어졌고 그것이 곧 정몽주의 암살로 이어졌다.

그는 한국의 초창기 성리학자로서 《주자가례》에 따라 사회 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의례제도 개혁을 꾀하였다. 불교국가였던 고려를

유교 이념을 중심으로 한 정치형태로 탈바꿈하려 했던 그의 시도는 비록 실패했으나, 정도전 등에게 그 뜻이 이어져 유교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한 조선 조정을 탄생시켰다.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로 추앙되었다.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불교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유학을 보급했다. 또한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 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을 참작,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였다. 또한 외교정책과 군사정책

에도 관여하여 기울어지는 국운을 바로잡고자 노력했으나 이성계의 신흥세력에 꺾였다.

시문(詩文)에 능하여 시조 〈단심가〉 이외에 많은 한시(漢詩)가 전하며, 또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