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부산·울산·대구·경상

[경북영천]600년전의 아름다운 우정이 전해 내려오는 영천광릉

by 柔淡 2010. 8. 31.

광릉하면 국립수목원이 있는 경기도 남양주 진접에 있는 조선 7대 대왕인 세조(재위 1455∼1468)와 부인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무덤으로 알고있는데 경상도 영천땅에도 광릉이란 무덤이 있어 한번 돌아보았다.

 

무덤의 위치나 규모로 보아 과연 웬만한 왕릉의 수준에 버금갈만한 것이었는데 그 무덤에는 600여년전 고려말 광주이씨와 영천최씨의

중시조 간에 아름다운 우정이 전해내려온다.

 

그 이야기를 소개해 보면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조상 중에서 오늘날 기록이 확실히 남아있는 사람이 한음의 8대조 되는 둔촌(遁村) 이집(李集)선생이므로 대부분의

광주이씨 들은 이당(李唐)을 시조로 하고 둔촌을 광주 이씨의 제1대로 기록하고 있다.

광주이씨(廣州李氏)와 영천최씨(永川崔氏)의 후손들 간에는 그들의 조상인 이집(李集)과 최원도(崔元道) 사이의 우의를 상고하면서 양가가

같은 날 묘제를 지내며 서로 상대방의 조상 묘에 잔을 올리고 참배하는 아름다운 풍습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최원도는 고려말 사람으로 중 신돈이 득세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경상도 영천 땅에 내려가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같은 시기에 벼슬과 학문으로 서로 우의가 돈독하던 이집(李集) 또한 얼마 후 신돈의 전횡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둔촌동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늙은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에 아버지 에게 까지 화가 미칠까봐 매우 걱정이 되었다. 큰 화가 닥쳐 올 것을 감지한

이집은 어느 날 밤 아버지를 등에 업고경상도 영천땅의 친구 최원도를 찾아 나섰다.

몇 달만에 도착한 최원도의 집에서는 마침 그의 생일 날 이라 인근 주민들이 모여 잔치가 한참 벌어지고 있었다. 최원도의 집 문간방에 아버지를

내려놓고 피곤한 몸을 쉬고 있는데 친구 최원도가 소식을 듣고 문간방으로 뛰어나왔다.

 

반가운 마음으로 얼른 최원도의 손을 잡으려는 이집을 향해 뜻밖에도 친구 최원도는 크게 노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 망하려면 혼자 망할 것이지 어찌하여 우리 집안까지 망치려 하는가. 친구에게 복을 전해주지는 못할망정 화를 전하려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

사태가 이렇게 되자 이집은 매우 난처해하며 몸을 의탁하러 온 것은 아니니 먹을 것이나 좀 달라고 부탁해 보았으나 최원도의 태도는 더욱 격노

하면서 이집 부자를 동네 밖으로 내몰게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최원도는 이집 부자가 잠시 앉았다 떠난 문간방을 역적이 앉았던 곳이라 하여 여러 사

람이 보는데서 불태워 버렸다.

한편 이집은 최원도에게 쫓겨나 정처 없이 떠나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최원도의 태도가 조금씩 이해되면서 그의 진심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한밤중에 다시 최원도의 집 부근으로 동네 사람들이 모르게 가만히 숨어들어 길옆 짚 덤불에 몸을 숨기고 하루 밤을 쉬고 있었다.

최원도 또한 이집이 자기를 이해해 줄 것이라 믿고 동네사람들 모르게 꼭 다시 찾아오리라고 생각하면서 날이 어둡자 혼자서 집 주위를 뒤져보다가

두 친구는 반갑게 만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이집 선생은 최원도의 집 다락방에서 이후 4년 동안을 보내게 되었는데 오로지 최원도 혼자만 알고 가족에게도 비밀로 하자니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우선 밥을 고봉으로 눌러 담고 반찬의 양을 늘려도 주인 혼자서 다 먹어 치우는 것이 시중드는 몸종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느껴졌다.

여러 달을 의아하게 생각하던 몸종이 하도 궁금하여 하루는 주인이 그 음식을 다 먹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고 문틈으로 엿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 둘과 함께 세 명이 식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몸종은 최원도의 부인에게 고하였고 부인은 남편에게 어찌된 연고인가를

묻게 되었다.

  
최원도는 부인과 몸종에게 사실을 이야기하고 비밀을 엄수 할 것을 다짐하였고, 만약에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두 집 가솔들 모두가 멸문의

화를 당할 것이라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자기의 실수로 주인집이 멸문을 당한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이라고 느끼게된 노비는 몇날을 고민하다가 결국 스스로 자결을 택하게 되었다.

그 몸종의 이름은 “제비”라 하였고 최원도 부부는 아무도 모르게 뒷산에 묻어주었는데, 나중에 이 사연을 알게된 최원도와 이집의 후손들이 그 몸종의

장사를 후하게 지내주고 묘비에 연아(燕娥)의 묘라고 세웠고 지금도 이집의 아버지 묘 부근에 최원도의 몸종 “제비”의 묘소가 있으며 양쪽집안 조상의

묘제 때 연아의 묘에도 함께 제사를 지내준다고 한다.

 

몸종이 자결한 후 얼마 안되어 이집의 아버지가 최원도의 다락방에서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이때 최원도는 자기의 수의를 내주어 정성껏 염습을 하고

주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자기 어머니의 묘 부근에 장사를 지내 주었다.

경상도 영천에 지금도 있는 광주이씨 시조 이당(李唐)의 묘가 바로 그것이다. 다락방 생활 4년만에 중 신돈이 맞아죽고 세상이 변하게 되어 나라에서

이집과 최원도를 중용 하려고 여러 번 불렀으나 이들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각자의 집에서 조용히 여생을 마치었다.

 

조선 왕조 선조 때 한음 이덕형 선생이 잠시 경상도 도체찰사를 겸직 한일이 있었고 이때 조상을 구해준 최씨 가문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위토를 마련

해주고 양가의 후손들이 대대로 두 어른의 제사를 함께 모시도록 일렀는데 이 관습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광주이씨 시조 이당의 묘. 영천최씨 최원도의 어머니묘 옆자리라고 한다.

 한눈에 보아도 아늑한 명당이다.

 수백년된 모과나무가 입구에 있고

 최원도가 둔촌 이집에게 보낸시비

 

“세상을 탄식하는 눈물이 옷깃을 적시고
고향 떠나서 아버지께 드린 효성 지하에까지 미치네.
한양은 멀고 먼 곳, 구름 연기만 자욱한데
나현(이당과 최씨 어머니가 묻힌 고개이름)위에 올라보니 수풀만
우거졌네.
앞뒤로 두개의 봉분을 나란히 세웠으니
그대와 나의 마음 누군들 알겠는가.
원하건대 대대로 지금같이 지내면서
서로의 이해를 떠나 깊은 정 변함없기를.”

 

 

 

 고택 어디나에 피어나는 배롱나무

 오래된 소나무가 이 광릉의 역사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광릉에서 내련다본 풍광.

 

 주변에 야생화도 많이 피어있다. 며느리밑씻개

 

 

 

 

 까마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