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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고궁,사찰,기타)

[여주]영릉을 통해서 알아본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by 柔淡 2010. 11. 29.

여주의 목아박물관 옆 걸구쟁이네란 독특한 사찰음식 전문점에서 점심을 먹고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세종대왕과 효종이 잠들어 계시는 영릉이다.

내가 영릉에 처음 와본것은 1978년 사관학교 4학년때이니 무려 32년 만이다.

그동안 여주에 자주 와 봤지만 도자기 축제나 신륵사 등만 돌아보고 매번 그냥 지나쳤었다.

 

조선왕릉(朝鮮王陵)은 1392년 고려 멸망 후부터 조선왕조가 멸망한 1910년까지 519년 동안의 조선 시대

역대 왕들의 무덤이다. 역대 왕조의 왕릉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하며, 왕과 비들의 무덤이 함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왕실의 장례와 제례를 엿볼 수 있으며, 국조오례의와 같은 상세한 기록까지 후대에 전해져 조선 시대의

왕실 문화를 잘 조명할 수 있는 문화재이다.[1]

한편 2009년 6월 27일, 유네스코는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조선왕릉 40기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로

결정하였다. 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역에 있는 제릉(태조의 정비 신의왕후의 능)과 후릉(정종

그의 왕비 정안왕후의 능), 그리고 태조의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양친의 능은 여기서 제외된다.[2]

 

조선 시대 법전인 경국대전의 "능역은 한양성 사대문 밖 100리 안에 두어야 한다"라는 입지 조건에 따라 선정되었다.

실제로 경국대전이 편찬되기 이전의 태조의 조상들의 능묘, 신의왕후의 능묘인 제릉, 정종의 능묘인 후릉

여주세종효종의 능묘인 영·녕릉, 영월에서 객사한 단종장릉을 제외하면 서울 사대문에서 100리 이내에

위치하고 있다.

왕릉은 풍수지리적인 요소를 고려해 위치를 선정하였으며, 바람, 물, 불, 나무, 흙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재해의

발생이 없어야 하고, 배산임수 지형을 갖추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에서 이장하기도 하였다.[3]

 

다음은 영릉에 대해 알아보자

영릉은 조선조 제4대 세종대왕(재위 1418~1450)과 소헌왕후 심씨의 합장릉이다. 대왕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한글을 창제하고 측우기, 해시계등 과학기구를 발명하였으며 아악을 정리하고

북방의 야인을 정벌하여 국토를 확장하였으며 대마도를 정벌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학문을 충정하여 학자를 양성하고 활자를 개량하여 용비어천가, 농사직설등 수많은 책을 발간하였다.

왕릉은 조선왕조의 능제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능의 하나로서 합장릉임을 알 수 있는 두 개의

혼유석이 있고 봉분 둘레에 돌난간을 둘렀으며 12개의 석주에는 12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능의 정중앙에 팔각의 장명등이 있으며 주위에 석호·석양·석마·문인석·무인석·망주석을 배치했고 능뒤에는

나즈막한 곡담을 둘렀다. 능밑에는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과 제사때 음식을 준비하던 수라간, 능을 지키는

관리가 살던 수복방이 있고 정자각 동편에 능비와 비을 세웠다. 정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해시계 자격루,

관천대, 측우기,혼천의 등 각종 과학기구를 복원해 놓았으며 세종전에는 대왕의 입적과 관련되어

여러 가지 유물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학술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세종대왕릉인 영릉.

왕릉은 원래 서울로 부터 100리 이내에 두어야 하는데 여주는 100리가 넘는다.

그런데 세종대왕릉은 왜 100리가 넘는 여주에다가 모셨을까?

풍수지리상 길지를 찾다보니 그렇게 했다는데 100리가 넘는 논리로는 서울에서 여주로 올때 한강을 거슬러 올라왔는데

뱃길은 거리에 산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왕릉의 배치

 

 영릉입구

 

 

 

 

 왕릉은 크게 진입공간, 제향/전이공간, 능침공간으로 나뉘는데 여기서부터 진입공간이다.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릉답게 문이름도 한글이다.

 

 홍살문부터 정자각 까지가 전이/제향 공간이다.

 

 

 능에도 어도와 신도가 있다.

 

 

 

 

 정자각

 

 정자각에도 정과 잡상이 있다.

 

 

 

 

 능을 지키는 능참봉이 살았던 수복방

 

 

 

 영릉비각

 

 

 

 능으로 올라가는 계단

 세종대왕과 왕비인 소헌왕후 심씨의 합장릉이다.

 

 

 문인석은 단위에 있고

 

  무인석은 단 아래에 있다.

명당이라는 소문답게 좌청룡, 우백호, 배산임수가 잘 갖춰져 있다고 한다. 

기념촬영 한컷

 

 예감

 능에도 수라간이 있다.

 

 

마지막으로 조선왕릉이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이유와 중요성을 알아보면

 

조선왕릉은 유네스코 세계유산협약에서 정하고 있는 10가지의 보편적인 가치 기준 가운데 아래의 세 가지 기준을 충족하였다.

첫째, 기준 3 문화적 전통 또는 살아 있거나 소멸된 문명에 관한 독보적이고 특출한 증거가 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왕조 특유의 세계관, 종교관 및 자연관에 의해 타 유교 문화권 왕릉들과 다른 자연친화적인 독특한 장묘 문화를 보여준다.

둘째, 기준 4 인류 역사의 중요한 단계를 보여주는 건조물의 유형, 건축적 또는 기술적 총체 또는 경관의 탁월한 사례이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5백년 이상 지속하여 만들어진 조선왕릉은 당대의 시대적 사상과 정치사, 예술관이 압축적으로 나타나 있으며 공간구성과 건축물과 석물 등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 독창성이 뛰어나다.

셋째, 기준 6 탁월한 보편적 중요성을 보유한 사건 또는 살아 있는 전통, 사상, 신념, 예술적/문화적 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계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국가 제례가 정기적으로 이어지고 있고, 왕의 신위를 모시고 제례를 지내기 위한 공간인 종묘가 설립되어 조상숭배의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

조선왕릉의 조형 예술적 가치
이런 보편적 가치와 함께 조선왕릉 만이 갖는 고유한 가치 또한 지나칠 수 없다. 무엇보다 조선왕릉은 그 전체 형태나 석물의 예술적 표현에서 고유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능묘와 견주어 알 수 있듯이 조선왕릉의 봉분 축조방식이나 원장설치, 각종 석물배치는 주변나라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문무인석의 조형이나 호석과 난간석은 조선왕조 조형예술에서 달성한 독특한 경지를 잘 보여준다. 또한 홍살문에서 향로를 따라 이어지는 정자각의 단순하면서 절제된 건축형태는 조선왕릉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엄숙하고 독특한 조형세계이다.
풍수 이론에 대한 고유한 해석
풍수 이론에 대한 조선 고유한 해석과 적용도 조선왕릉이 보여주는 문화적 특징이다. 조선왕릉에 적용된 풍수이론은 한반도의 지리특성이 고려된 조선 고유한 방식으로 구현 되었다. 중국처럼 지리적 약점을 인공적인 구조물로 보완하려는 방식 대신에 자연지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그 조건에 구조물을 맞추어나가는 자연친화적인 방식을 선택하여 그 가치와 독창성을 더한다.
조선왕릉과 함께 하는 기록 문화
조선왕릉과 관련한 풍부한 기록물 역시 주목할 가치이다. 능원을 조성하면서 작성한 산릉도감의궤는 석물의 배열이나 정자각의 조성과정은 물론 산릉조성을 위해서 흙을 지어 나르는데 참여한 단순노역자의 이름까지 작성한 모든 문서가 남아있다. 산릉도감의궤는 왕릉이 만들어졌을 때의 모든 내용을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따라서 설령 왕릉 중 일부가 불의의 사고로 훼손되거나 본래 모습을 상실했다고 해도 이들 의궤를 통해서 원래 모습으로 복구하는데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산릉도감의궤라는 뛰어난 기록물이 있음으로써 조선왕릉은 그 물리적 진정성을 견지할 수 있으며 이것이 조선왕릉이 갖는 고유한 가치의 또 다른 면이라고 생각된다.
6백년을 이어온 왕실의 제례
끝으로 언급해야 할 것은 6백년을 이어온 조선왕릉의 제례이다. 1910년 조선왕조가 막을 내렸을 때 왕릉의 제례 역시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운 여건에 처했다. 그러나 전주 이씨 종약원이 어려운 소임을 맡아서 제례를 계속해 나갔으며 그것은 21세기에 접어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주 이씨 종약원은 왕릉 제례 외에도 종묘제례도 주관하면서 조선왕조의 무형적인 문화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조선왕릉에 대해 더 아시고 싶은분은 조선왕릉 전시관 (http://royaltombs.cha.go.kr/index.html)을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