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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고궁,사찰,기타)

[여주]조선시대에 이렇게 정밀한 과학기기들이 있었다니!

by 柔淡 2010. 11. 30.

세종대왕릉인 영를에 들어가다 보면 왼쪽에 여러개의 이상하게 생긴 다양한 청동제 과학기기 들이

눈에 띄는데 그 생김새가 아주 이채롭다.

이것들은 세종대왕의 재위중에 만들어진 다양한 천체 및 기상관측 기구들인데 600여년전에 벌써

이런 천체 관측용 과학기기들이 만들어 졌다는게 참으로 놀라웠다.

그날 본 기기들을 하나씩 소개하기 전에 먼저 세종대왕을 도와 이런 관측기기들을 만드는데 가장

주역이었던 장영실과 이천 이라는 두 사람을 소개해야 이해가 빠를것 같다.

 

장영실

비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재능과 기술로 조선 전기 과학기술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본관은 아산(牙山). 아버지는 귀화한 중국인이며, 어머니는 기녀였다고 한다.

동래현(東萊縣)의 관노(官奴)로 있다가 뛰어난 기술재능으로 발탁되어, 1423년(세종 5) 노비 신분을 벗고

상의원별좌(尙衣院別座)로 임명되었다.

1424년 중국의 체재를 참고하여 물시계를 만들어 그 공으로 행사직(行司直)이 되었다.

1432년 김돈(金墩)·이천(李) 등을 도와 간의대(簡儀臺)의 제작에 착수하고, 각종 천문기기의 제작을 감독했다.

1433년 호군(護軍)에 올랐으며, 같은 해 6월 혼천의(渾天儀)를 완성했다. 이듬해 김빈(金)과 함께 자동시보

(自動時報)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다.

11세기 송(宋)의 소송(蘇頌)이 제작한 천문시계장치와 아라비아 시계의 자동시보장치에 영향을 받은 이 시계는

시(時)·경(更)·점(點)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종·북·징을 쳐서 시보를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1434년 7월 1일부터 사용된 표준시간은 자격루에 맞추어 운용되었다. 또한 같은 해 금속활자인 경자자(庚子字)의

결함을 보완한 갑인자(甲寅字) 제작을 감독했다.

1437년 천체관측용 기구인 대·소간의(大小簡儀), 공중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

(懸珠日晷), 태양시(太陽時)와 항성시(恒星時)를 측정하여 주야 겸용 시계로 쓴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圭表) 등을 완성했다. 다음해 자격루의 일종인 옥루(玉漏)를 제작, 완료하고

경상도 채방별감(埰訪別監)이 되어 동(銅)·철(鐵)의 채광·제련을 지휘, 감독했다.

1441년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測雨器)와 하천 수위 측정기인 수표(水標) 제작을 감독, 완성했다.

상호군(上護軍)으로까지 특진했으나 1442년 그의 감독으로 제작된 왕의 가마가 부서지는 바람에 투옥, 파면당했다.

 

또 다른 한분은 이천이다.

이천은 조선초기의 무신이며 과학자로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자현(子見), 호는 백곡(栢谷)·불곡(佛谷). 아버지는

군부판서 송(竦)이고, 어머니는 곡성염씨(曲城廉氏)이다.

1393년(태조 2) 별장(別將)이 되었다. 1402년(태종 2) 무과에 급제, 1410년 무과 중시(重試)에 급제했다.

세종이 즉위한 후 동남연해(東南沿海)에 출몰하는 왜구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충청도병마도절제사가 되었다.

1420년(세종 2) 공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세종의 지시로 1403년(태종 3) 만들어졌던 계미자(癸未字)의 기술상의 결점을  

해결하기 위해 남급(南汲)과 함께 새로운 청동활자와 인쇄기를 만들었다.

이어 1434년 7월 지중추원사로 있으면서 보다 아름다운 글자체를 만들기 위해 김돈(金墩)·김빈(金鑌)·장영실(蔣英實)·

이세형(李世衡)·정척(鄭陟)·이순지(李純之) 등과 새로운 청동활자인 갑인자(甲寅字)의 주조사업을 감독하여 20여 만

자의 크고 작은 청동활자를 완성해 큰 글자와 작은 글자를 필요에 따라 섞어 조판할 수 있게 되었다.

1431년 배를 만드는 데 판자와 판자의 연결 부분에 생기는 틈을 막아 판자를 이중으로 붙이는 갑조법(甲造法)을 쓰게 했다.

1432~37년 서운관(書雲觀)에서 정초(鄭招)·장영실·김빈 등과 함께 천체관측기기 개발에 노력하여 천문대용 관측기인

대간의(大簡儀), 휴대용 관측기인 소간의(小簡儀), 천구의(天球儀)인 혼의(渾儀)·혼상(渾象), 해시계인 일구(日晷)·

앙부일구(仰釜日晷),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누호(漏壺), 측후기(測候器)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등을 제작했다.

또한 병선·군기·화포 등 전술무기를 개량했다.

1437년 9월 평안도절제사로 8,000명의 정벌군을 이끌고 삼로(三路)로 나뉘어 압록강을 건너 여진족을 소탕했다.

그뒤에도 서북 방면에서 침략해오는 여진족을 물리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450년 판중추원사에 이르러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시호는 익양(翼襄)이다.

 

두분에 대한 역사상의 기록을 보면 장영실은 실제로 몸을 움직여서 과학기기를 만든 핵심기술 및 과학자였고

이천은 그런 장영실이 제대로 일할수 있도록 뒷받침해주고 지원해준 과학행정가의 모습이 떠오른다.

 

세종대왕 시대의 발명품중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자격루.

물시계는 물의 증가량 또는 감소량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장치로서, 삼국시대부터 나라의 표준 시계로 사용하였다. 조선 세종 16년(1434) 장영실에

의해 정해진 시간에 종과 징·북이 저절로 울리도록 한 물시계가 처음 제작되었으나, 오래 사용되지는 못하였고, 중종 31년(1536)에 다시 제작한

자격루의 일부가 현재 덕수궁에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물시계의 원리를 보면, 맨 위에 있는 큰 물그릇에 넉넉히 물을 부어주면 그 물이 아래의 작은 그릇을 거쳐, 제일 아래쪽 길고 높은 물받이 통에 흘러든다.

물받이 통에 물이 고이면 그 위에 떠 있는 잣대가 점점 올라가 미리 정해진 눈금에 닿으며, 그곳에 장치해 놓은 지렛대 장치를 건드려 그 끝의 쇠 구슬을

구멍 속에 굴려 넣어준다. 이 쇠구슬은 다른 쇠구슬을 굴려주고 그것들이 차례로 미리 꾸며놓은 여러 공이를 건드려 종과 징·북을 울리기도 하고, 또는

나무로 만든 인형이 나타나 시각을 알려주는 팻말을 들어 보이기도 한다. 지금 남아 있는 물시계는 쇠구슬이 굴러 조화를 이루던 부분이 없어진 채,

물통 부분들만 남아 있다.
청동으로 된 큰 물그릇은 지름 93.5㎝, 높이 70.0㎝이며, 작은 물그릇은 지름 46.0㎝, 높이 40.5㎝이다. 작은 물그릇이 놓였던 돌 받침대는 지금 창경궁

명정전 뒤에 2개가 남아 있다.
현재 중국 광동에 남아 있는 명나라의 물시계보다 조금 늦게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규모가 크고 만듦새가 훌륭하여 매우 귀중한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수표

 

 풍기대

 

 측우기

측우기에 의한 우량의 측정 제도가 확립된 것은 1442년 5월이다. 이때 처음으로 〈세종실록〉에 측우기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쇠를 부어 만든 측우기는

길이가 1자 5치, 지름이 7치로 개량되고, 강우량은 비가 그쳤을 때 주척(周尺)을 써서 자·치·푼(分)까지 정확하게 재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 일시와

갠 일시를 기록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강우량의 측정은 각 도와 군·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시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 확정된 측우기는 높이 32㎝, 지름 15㎝가량의 철제

원통이고, 주척의 길이는 약 21㎝이다. 이때부터 측우기로 강우량을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일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측정된 강우량은 곧 집계되고 각 지방의 통계는 중앙에 정기적으로 보고되어 전국에 걸친 강우량이 정확히 기록·보존되었다.

강우량을 재는 과학적인 방법이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아직 싹트지 않았을 때 조선에서 확립되었음은 매우 큰 의의를 가진다.
우리나라 측우기는 15세기 전반기에 제작된 세계 최초의 기상 관측기기이다. 조선에서는 이 기기를 이용해 수백 년 동안 전국적으로 강우량 측정을 했다.

초기의 관측기록은 거의 없어졌지만, 1770년 이후부터 140년 동안의 서울 관측기록이 남아 있다. 그것은 현대의 관측치까지 합하면 220년 이상의 연속

관측기록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 귀중한 자료이다.

여기까지가 일반 백성들의 생활에도 아주 많은 영향을 미친 기구 들이라면 아래의 것들은 년, 월, 일, 시와 천체를 관측하는 과학기기 들이다. 

 

 천상분야열차지도

 

 일성정시의 

 

 앙부일구. 해시계 

 

일구대. 해시계 받침대. 해시계는 창덕궁 영화당 앞에도 있고, 덕수궁 미술관 앞에도 있고,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에도 있다.

 

 규표

 

 

 혼천의 

 

 적도의 

 

 

 정남일구 

 

 

현주일구

  

 천평일구 

 

소간의 

 

 간의

 

 혼상

  

과학기술이 발달한 지금 시대에 봐도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600여년전에 저런 기구들을 발명하도록 지시하고 독려했던 세종대왕과 그걸 실제로 만들어 냈던 장영실, 이천이란 훌륭한 과학자들이

정말 대단한 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