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유산(고궁,사찰,기타)

[종로]1박2일멤버들이 둘러보았던 경복궁의 주요 문화재 함께 찾아보기

by 柔淡 2012. 2. 12.

지난주말 1박2일 프로그램에서 경복궁의 주요 문화재를 유홍준 교수님의 안내로 함께 둘러 보았는데

마침 2년전 천록, 드무, 박석, 자경전 꽃담장, 교태전의 굴뚝, 경회루, 장고 등을 찍어 놓은게 있어

다시 포스팅해본다.

 

지난 11월 20일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주최하는 세계유산 연계체험 프로그램 “왕에게 가다” 팸투어에

참여했다. 세계유산 연계체험 프로그램 “왕에게 가다” 팸투어에서는 경복궁의 광화문, 영제교, 근정전,

사정전, 교태전, 경회루, 수정전, 자선당, 세종대왕릉인 영릉, 재실, 황살문, 정자각, 비각, 능상,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다양한 과학기기 등을 둘러 보았는데 그 첫번째 코스가 경복궁이었다.

 

 

사실 나는 그 1주 전에도 단풍을 보러 경복궁에 다녀왔기에 이번에는 내가 그동안 수없이 서울의 궁궐에

다녀왔어도 알지못했던 궁궐내의 특이한 조형물에 대해 안내하시는 해설사님께 집중적으로 질문을 했다.

 

그대표적인게 해태, 천륵, 잡상, 등 궁궐의 전각이외의 조형물들이다.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그동안 무너지고 없어지고 왜곡되었던 것들이 지난 광복절 대부분 제자리를 찾았다.

 

 

해태에 대한 여러가지 주장이 있는데

중국 문헌인 《이물지(異物志)》에는 "동북 변방에 있는 짐승이며 성품이 충직하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사람을 뿔로 받는다"

라고 설명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대사헌의 흉배에 가식(加飾)되기도 하였고,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神獸)로 여겨 궁궐 등에 장식되기도 하였다.

광화문 앞 해태가 서울의 방화풍수 때문에 건조된 것이라는 이야기는 박제형(朴濟炯) 의 조선근세정감(朝鮮近世政鑑)에 적혀있다.

이 기록에는 "대원군이 음양 풍수설을 믿어서 새 궁궐이 예부터 자주 화재를 당하는 것은 모두 불형체인 관악산이 안산으로 된 데에 연유한다.

이에 흰 돌로써 물짐승 형상을 새겨서 궁문 앞 양쪽에다 두었다. 또 관악산 제일 꼭대기에다 우물을 파고 구리로 만든 용을 우물에다 넣어서

화기를 진압하였다." 고 적혀 있다.

여기에는 해태가 물에 사는 수성(水性)의 짐승이라는 이야기와 따라서 수제화(水制火)의 오행설에 맞추어 관악과 바라보게 했다는 이야기다.

광화문앞 우측의 해태

좌측의 해태

광화문 석축위 우측의 해태

좌측의 해태

경복궁의 해태는 그외에도 금천을 지나는 영제교 좌우측 난간위에도 있다.

그만큼 화재를 두려워하고 조심했다는 이야기다.

 

금천의 바로 건너편에 천록이라는 귀여운 동물이 궁궐을 지키고 있다.

 

유홀준 교수의 국보순례 인용

우리는 경복궁의 상징적인 조각으로 해태(獬豸)상은 익히 알고 있으면서 천록(天祿 또는 天鹿)이라는 조각상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근정문 앞 금천(禁川)을 가로지르는 영제교(永濟橋) 양옆 호안석축(護岸石築·강변의 흙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돌로 쌓은 축대)에 있는 네 마리의

돌짐승이 바로 천록이다.

이 돌짐승을 혹은 해태, 혹은 산예(狻猊·사자 모습을 한 전설상의 동물)라고 하지만, 해태는 털이 있어야 하고, 산예는 사자 모양이어야 하는데 그런

특징이 보이지 않는다. 뿔이 하나인 데다 비늘이 있는 것을 보면 전형적인 천록상이다.

이 돌조각은 경복궁 창건 당시부터 있었던 것으로 조선시대 뛰어난 조각 작품의 하나로 손꼽을 만한 명작이다. 다만 그 중 한 마리는 이상하게도 등에

구멍이 나 있고, 또 한 마리는 일찍부터 없어져 2001년 영제교를 복원할 때 새로 조각하여 짝을 맞춰 둔 것이다.

그런데 실학자 유득공(柳得恭·1749~?)이 영조46년(1770) 3월3일 스승인 연암 박지원(朴趾源), 선배 학자인 청장관 이덕무(李德懋)와 함께 서울을 나흘간

유람하고 쓴 〈춘성유기(春城遊記)〉에 이 돌짐승 이야기가 나온다.

"경복궁 옛 궁궐에 들어가니 궁 남문 안에는 다리가 있고 다리 동쪽에 천록 두 마리, 서쪽에 한 마리가 있다. 비늘과 갈기가 완연하게 잘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이어 말하기를 "남별궁(南別宮) 뒤뜰에 등이 뚫린 천록이 있는데 이와 매우 닮았다. 필시 영제교 서쪽에 있던 하나를 옮겨다 놓은 듯한데 이를

증명할 만한 근거는 없다"고 했다. 남별궁은 지금 조선호텔 자리에 있던 별궁이었으니 이제 와서 그 돌조각을 다시 찾아낼 길은 없다.

〈예문유취(藝文類聚)〉등 옛 문헌을 보면 "천록은 아주 선한 짐승이다. 왕의 밝은 은혜가 아래로 두루 미치면 나타난다"고 하는 전설상의 서수(瑞獸)이다.

옛 궁궐에는 임금의 은혜가 백성에 미치는지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천록이 있었다.

나는 백제 무령왕릉의 서수도 천록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다만 같은 천록상이라도 무령왕릉의 천록은 이미 세상에 나타나 당당히 왕릉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지만, 경복궁의 천록은 앞발에 턱을 고이고 넙죽 엎드려 있으면서 나타날까 말까 궁리중인 것 같은 형상이다.

 

부시 - 궁궐 건물 위를 보면 그물 같은 것이 쳐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을 ‘부시’라고 부른다. 전통 가옥의 처마는 새들이 둥지를 틀기 좋은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새들의 분비물로 인한 건물의 부식을 막고, 새를 잡아먹기 위해 뱀이 기둥을 타고 올라와 살생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

하기 위하여 부시를 설치했다고 한다.

대들보 밑에 삼지창 처럼 생긴것도 같은 목적이다.

박석 - 조정은 법전에 들어서면 보이는 조회를 하는 넓은 뜰을 의미한다. 조정에는 화강암으로 된 큰 돌들이 깔려 있는데, 이렇게 얇고 넓적한 돌을

박석이라고 부른다. 박석은 크기가 일정치 않으며 표면도 울퉁불퉁하다. 궁궐에 이런 돌을 깔았던 첫 번째 이유는 왕이 행사에 참가시 건물안에서

밝은 뜰 위에 서있는 신하들을 보게 되는데, 땅에 반듯한 돌들이 깔려 있으면 눈이 부시므로 난반사를 일으켜 빛이 분산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당시의 관원들은 가죽신을 신었는데, 돼지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미끄러운 바닥에서는 그런 가죽신이 미끄러지기

마련이니, 5센티미터 정도 되는 얇은 박석을 울퉁불퉁하게 처리하여 임금님 앞에서 행여나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정(朝廷)에 있는 박석은 약간 바깥 쪽을 향해 경사가 져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비가 올 경우 박석 옆으로 물이 빠지게 되어

배수시설을 따로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

 

차일고리 - 각 궁궐의 중심이 되는 근정전, 인정전, 명전전 등 법전의 기둥과 조정의 박석에는 둥근 쇠고리가 있다. 이 쇠고리는 중요 행사나 의례가 있어

관료들이 장시간 모여있을 때에 햇살이나 비를 가려줄 차일(천막)을 쳤는데, 이 고리가 바로 그런 차일을 치는 줄을 매던 고리이다.

서수가족, 상서로운 동물이라는 뜻이다.

근정전 을 둘러싼 난간위에 12지신상중 쥐와 뱀을 제외한 10개의 동물들을 조각한 석상들이 잇다.

 

 

 

 

 

 

 

일월오악도 - 법전 안을 들여다 보면 임금님의 용상 뒤에 큰 그림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일월오악도, 일월오봉도, 일월오봉병(병풍)이라

부르는 것으로 왕권을 상징한다. 그림의 양쪽에 해와 달이 있고, 다섯 봉우리가 있으며, 소나무와 폭포, 그리고 푸른 물결이 그림을 구성하고 있다.

이 그림은 임금을 향한 백성들의 칭송과 나라 융성의 염원, 그리고 우주 질서에 대한 외경심이 나타나 있다.

 

임금을 상징하는 용

 

말이나 가마를 탈때 사용한 받침돌

잡상 - 큰 건물의 처마 마루에는 줄지어 앉아 진흙으로 만든 와제 토우를 말한다. 우리는 이를 잡상이라 부르는데 궁궐지붕위에서 잡귀를 쫓는

벽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잡상들의 모습은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 현장스님,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이다.

삼장법사는 가사장삼대신 머리에 갓을 쓰고 몸에는 갑옷을 걸쳤으며 눈은 부릅뜨고 다리를 벌리고 위풍당당하게 앉아있어 수행자의 모습이

아니라 오직 무사로서의 위엄을 갖추어 있고 손오공도 삿갓을 쓴 포졸의 모습이다.

이들은 주로 천지를 떠도는 잡신이나 귀신을 잡아 궁궐을 지키는 일종의 군사들인 셈이다.

 

전각의 규모에 따라 잡상의 갯수가 달라지는데 경회루 지붕위의 잡상이 11개로 가장 많다고 한다.

품계석.

좌측에 무반, 우측에 문반이 위치하고 있었고 정1품부터 정구품까지의 표식이 있다.

문반과 무반을 합쳐서 양반이라고 했다.

- 법전 어귀에서는 다리가 셋이고 귀가 둘 달린 둥근 청동 솥을 보게 되는데, 이를 정이라 한다. 처음에는 흙을 구워 만들었으나 나중에는 청동으로

만들었고, 주로 고대 종교 의례나 국가의 큰 잔치 때 사용되었던 예식용 그릇 가운데 솥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는데, 중국의 옛 기록에 따르면

천자는 9개의 정, 제후는 7개의 정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이 구정(九鼎)은 왕권과 중국의 아홉 개의 주를 상징하며 또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고 하늘의 복을 받기를 기원하는 상징물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역시 왕권의 상징물로 보여진다.

드므 - 법전이 위치하고 있는 월대 위에 각 모서리에는 쇠솥처럼 생긴 것이 있다. 이것은 드므라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궁궐의 건물들은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화재 발생시 주로 대화재가 일어나므로 불을 끌수 있는 소방수를 갖다 놓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정도

물을 갖고는 화재를 진압 할 수 없다. 이것은 일종의 의식용이다.

불귀신은 자기 얼굴이 얼마나 흉측하고 무서운지 알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불귀신이 불장난을 치기 위해 법전으로 달려 오다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게 되는데, 평소에 자기 얼굴을 모르고 있던 불귀신이 자기 얼굴에 놀라 도망간다고 한다.

경복궁안 왕비의 처소인 자경전 뒤쪽으로 가면 아름다운 굴뚝들이 화계위에 여러개 있다.

굴뚝 - 우리나라의 전통가옥에는 그 규모나 격식에 걸맞는 굴뚝을 만든다. 특히 경복궁의 후원 아미산의 굴뚝은 정말 아름답다. 그리고 굴뚝이 있는

것은 온돌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리고 굴뚝위에는 작은집 연가가 있는데 이 연가는 연기속의 재를 걸러주는 기능을 한다고 한다

 

 

 

 

자경전

경복궁 동궁의 북쪽, 교태전의 동북편, 현재 민속박물관의 서남편에 보면 담장으로 둘러쳐진 안에 바로 자경전이 있다. 자경전은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 없어지기 이전에는 없던 건물이다. 애초에 '자경'이란 이름은 정조 임금이 즉위하면서 그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창경궁에

커다랗게 집을 짓고 자경당이라 이름을 붙인 데서 비롯되었다. 자경이란 자친, 곧 왕이 어머니나 할머니 등 왕실의 웃어른이 되는 여성에게

경사가 임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종 4년에 자경전이란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비로소 경복궁에 자경전이 자리를 잡았다 당초 자경전이 완공될 무렵에는 고종이 정무를 보는

건물인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승지들이 공무를 가지고 입시하기도 하였고, 진강 - 왕이 관인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고, 소견 - 고위

신료들을 불러들여 정사를 의논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873년(고종10년) 12월에 큰 불이나서 그 일대 건물들과 함께 불타 없어졌다. 이 화재

직후 곧 다시 지었으나, 지은지 1년 반쯤 뒤인 1876년(고종13) 11월에 또 불이 나서 타버렸다. 이때 고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간 뒤에 자경전을

다시 지었다. 그 자경전이 조금씩 변하면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꽃담

자경전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꽃담'이라고 불리는데 흙을 구워 그림을 박아넣었다. 무늬에는 만자나 육각형의 벌집모양, 귀갑문등이 있고,

그 사이사이에 작은 꽃을 넣기도 하였다. 글자는 마치 왕의 옥새를 보는 듯 조형미가 뛰어난 전자로 되어있다.

자경전은 정면 10 측면 4칸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현재 보물 80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꽃담이 삼성의 에버랜드 호암미술관 희원에 그대로 모방되어 있는데 이것만큼 고졸스럽지는 않다.

경회루

 

태조 때 경복궁 서북쪽에 작은 누각을 지었으나, 태종 12년(1412) 4월 보다 큰 규모로 새롭게 누각을 짓고, 같은 해 5월 하륜에게 명하여 이름을 '경회루'라고 했다.
경회(慶會)의 뜻은 하륜이 태종의 명을 받들어 올린 기(記)에 "올바른 정사를 펴는 임금은 올바른 사람을 얻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으니, 올바른 사람을 얻어야만 '경회(慶會)'라고 할 수 있다"고 밝히며 이는 곧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써 서로 만나는 것을 말한다"고 적고 있다.
태종 당시 원래 이곳은 사신의 접대 등을 목적으로 지어졌다. 하지만 그 외에도 과거시험이나 활쏘기 등을 열거나, 공신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어 왔다. 또한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 뒤 성종 6년(1475) 퇴락한 경회루를 대대적으로 개축하게 된다. 이 때 경회루 돌기둥에는 용을 새겨 넣는 등 다소 화려하게 꾸미기도 한다.
이 화려한 모습을 보고 유구(오키나와)의 사신이 "용이 물 속에 비치어 그 모습이 장관"이라며 극찬했다는 이야기가 성현의 <용재총화>에 전하고 있을 정도로 경회루의 모습은 매우 화려했다고 한다.
또한 연산 12년(1506)에는 경회루 서쪽에 만세산을 쌓고 금은 비단으로 화려하게 꾸미고 흥청(기생)에게 가무를 추게 했으며, 황룡주(黃龍舟)를 타고 만세산을 왕래하며 사치를 일삼기도 했다.

하지만 경회루의 이러한 모습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완전 소실되어 폐허로 남게 된다. 그후 경회루는 고종 4년(1867) 4월에 재건되었지만 일제시기에 경회루 주변 담장이 모두 헐린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경회루 동쪽 돌다리 부근에는 일부 담장의 초석이 남아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밖에 경회루 부속 건물처럼 경회루 북쪽에 있는 육각정은 이승만 대통령시절 대통령을 위한 휴식과 낚시를 목적으로 지어진 하향정(荷香亭)이라고 한다.
경회루의 현판 글씨는 건립 무렵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썼으나, 지금의 현판은 '조일강화조약(1876)'을 맺을 때 접견대신을 지냈던 신헌(申櫶)의 글씨다.
한편 경회루는 단일 누각으로 국내 최대규모의 웅장함을 자랑하지만, 그 건축적 특성면에서 심오한 우주의 원리를 담고 있다.

이는 고종 2년(1865) 경회루 재건공사가 시작될 무렵 경회루의 평면과 세부형태를 주역의 원리로 설명한 정학순(丁學洵)의 <경회루전도>에 잘 나타나 있다.
정학순은 <경회루전도>를 통해 경회루의 원리를 밝히는 가운데 경회루는 불을 억제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밝히면서 그 속에 깃든 뜻풀이를 시도했다.
즉 경회루로 건너가는 3개의 다리는 해, 달, 별의 삼광(三光)을 뜻하고, 다리를 건너 경회루 기단 양끝에 있는 2개의 문은 음양(陰陽)을 뜻한다고 한다.
또한 경회루의 바깥 돌기둥이 네모지고 안쪽 기둥이 둥근 것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을 드러내 준다고 한다.
경회루의 상층은 3중으로 되어 있는데 정중앙의 1중 3간은 천지인(天地人) 삼재를 의미하며, 이 3간의 기둥을 이루고 있는 8개의 기둥은 8괘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 다음 1중을 둘러싸고 있는 2중의 12간은 일년 12달을 의미하고, 기둥 16개의 각 기둥 사이에 네짝의 문이 달려 있어 이는 64궤를 의미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2중을 둘러싸고 있는 3중의 24개의 기둥은 24절기를 상징한다고 한다.
또 동으로 만든 용 두 마리를 연못 북쪽에 넣어 두었는데 이는 불을 막기 위해서라고 적고 있다. 실제로 1997년 11월 경회루 연못의 물을 빼고 청소를 하던 도중에 북쪽 못 바닥에서 동으로 만든 용이 출토되기도 했다.

경회루는 남북 113m, 동서128m의 연못 가운데 2층 누각을 지어 세웠으며 정면 7간 측면 5간 총 35간의 규모에 이익공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경회루는 현재 국보 224호로 지정되어 있다.

 

 

 

 

 

 

 

 

 

 

 

 

 

 

 

 

궁궐을 돌아보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조상들은 건물하나, 돌조각 하나에도 의미와 실용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고

생김새도 참 예쁘게 만들었다. 그동안 아무 생각없이 지나치기만 했는데 그의미와 용도를 자세하게 알게되니

재미도 있었다.

 

그 외에도 경복궁내의 여러전각들을 둘러 보았는데 내 블로그에 여러번 포스팅 했기에 생략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