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유산(고궁,사찰,기타)

[종로]1박2일 서울 2탄, 세계문화유산, 종묘 돌아보기

by 柔淡 2012. 2. 12.

1박2일 2탄으로 종묘가 나왔다.

사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잇는 사람이라면 종묘에 대해서 대부분 알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르기에 1박2일에서 다뤘을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침 예전에 종묘를 샅샅이 찍어 놓은게 있어 다시 정리해 본다.

 

종묘는 도심한복판에 있지만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곳이다.

더구나 그 일대가 노인천국이 되고난 후부터는 사람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일부러 종묘에서 출발해 창경궁을 거쳐 경복궁까지 돌아보는 코스를 택했다.

창덕궁이 창경궁과는 담하나 사이 이지만 아직 통합관람제가 시행되지 않고 있고, 창덕궁은 작년가을에

단풍을 보러 다녀왔기에 일부러 경복궁으로 코스르 정한것이다.

종묘와 창덕궁은 육교로 연결되어 있어 입장료 천원만 내면 종묘와 창경궁을 한꺼번에 돌아볼수 있는

장점이 있다. 5월부터는 서울의 4대궁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을 통합관람하는 제도를 시행

한다니 그때를 기다리는 수 밖에.

 

종묘 (문화재청 홈페이지 소개글)

종묘는 조선왕조의 왕과 왕비, 그리고 죽은 후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종묘는

본래의 건물인 정전과 별도의 사당인 영녕전을 비롯하여 여러 부속건물이 있다.

태조 3년(1394)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완성되었다. 태조는 4대(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추존왕을 정전에 모셨으나, 세종 때 정종이 죽자 모셔둘 정전이 없어 중국 송나라 제도를 따라

세종 3년(1421) 영녕전을 세워 4대 추존왕의 신위를 옮겨 모셨다.

정전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8년 다시 지었고, 몇 차례의 보수를 통해 현재 19칸의 건물이

되었다. 정전에는 19분의 왕과 30분의 왕후를 모시고 있다. 영녕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1608년 다시 지었다.

현재 16칸에 15분의 왕과 17분의 왕후 및 조선 마지막 황태자인 고종의 아들 이은(李垠)과 부인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 앞 뜰에는 조선시대 83명의 공신이 모셔진 공신당이 있고, 중요무형문화재인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전해진다.

종묘는 동시대 단일목조건축물 중 연건평 규모가 세계에서 가장 크나, 장식적이지 않고 유교의 검소함이 깃든

건축물이다. 중국의 종묘가 9칸인데 비해 19칸의 긴 정면과 수평성이 강조된 건물 모습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독특한 건축물이며, 동양 고대문화의 성격과 특징을 연구하는데 필요한 귀중한 자료가 담긴 유산이다.

종묘의 정전과 영정전 및 주변 환경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종묘제례와 음악·춤의 원형이 잘 계승되어,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종묘 요도

 

종묘의 정문은 남쪽에 사묘(祠廟)의 표문(表門)답게 정면 세 칸의 평삼문(平三門)으로 되었고, 정문 좌우로는 종묘외곽을 두르는 담장과

연결되어 있다. 정문 안 서쪽으로는 본래 종묘를 지키는 수복방이 있었다. 정문은 원래 전면 중앙에 난 계단으로 오르내리게 되어 있었는데,

일제시대에 도로를 조성하면서 도로 면이 높아지게 되어 땅에 묻히고 지금은 단벌의 장대석 기단만 있다.
종묘 정문은 외대문(外大門) 또는 외삼문(外三門)이라고도 한다. 정문은 궁궐 정문과는 달리 구조 형태가 아주 검박하고 단순하다. 정문밖에는

하마비(下馬碑)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된 어정(御井)이 있다.

지당

향대청

종묘 정문을 들어서면 지당(池塘)이 있고, 그 동쪽으로 망묘루, 공민왕 신당, 향대청 일곽이 있다.
향대청은 종묘에 사용하는 향축폐(香祝幣)와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祭享)에 나갈 헌관들이 대기하던 곳으로 남북으로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지금은 종묘제례에 대한 전시 영상관으로 쓰인다.

공민왕 신당의 영정

공민왕 신당은 망묘루 동쪽에 있는 별당으로 고려 31대왕 공민왕을 위하여 종묘 창건시에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신당 내부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한자리에 있는 영정(影幀)과 준마도(駿馬圖)가 봉안되어 있다.
신당의 정식 명칭은 '고려 공민왕 영정 봉안지당(高麗 恭愍王 影幀 奉安之堂)'이다.

 

정전 가는길

가운데는 혼령이 니는 길이라 일반 관람객들은 다니지 않는게 좋다.

재궁

정전 동남쪽에 위치한 재궁은 어숙실이라고도 하며 국왕이 제사를 준비하던 곳이다.
재궁 북쪽에는 임금이 머무는 어재실, 동쪽에는 세자가 머물던 세자재실(世子齋室)이 있고, 서쪽에는 어목욕청(왕이 목욕하는 건물)이 있다.

어목욕청.

제사를 준비하는 왕이 목욕재계를 하는곳

전사청

전사청은 종묘제사에 사용하는 제수의 진찬 준비를 하던 곳으로, 뜰을 가운데 두고 그 주위로 건물을 ㅁ자형으로 배치하였다.
주실은 정면 7칸, 측면 2칸이고 옆에 온돌과 마루방을 들여 행각으로 꾸몄다

 

제정

제정은 향제(享祭)에 사용되는 우물을 말하는데 정전 전사청(典祀廳)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찬게 특이하다고 한다.

네면을 담장으로 둘렀고, 남쪽에 팔작지붕의 일각문(一脚門)이 있다.

정전의 오른쪽으로 들어가는길

정전 우측문의 계단

전전의 신위를 모신 회랑

 

정전에 신위가 보관된 19명의 왕과 왕비

정전의 전경

 

정전 입구

영녕전

영녕전은 신실 하나하나의 구성은 정전과 크게 다름이 없지만 부재의 크기가 정전보다 약간 작고 전체 건물 규모도 정전보다 작기 때문에 정전에서와

같은 장대함을 느끼기에는 뒤지는 감이 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공간이 한눈에 쉽게 들어와 친근감을 더해 준다.
네모난 아랫부분에 원형 주좌를 둔 주춧돌에 둥근 기둥과 간단한 초각을 한 익공을 짜고, 퇴칸 안에 두 짝 판문을 달고 뒤는 화방벽으로 쌓고 서까래는

부연 없는 홑처마로 꾸미는 등 세부 구성은 정전과 거의 같으며 역시 부재 표면도 단청 없이 간단히 주칠로 마감하였다.

정전과 좌우 익실 앞으로 동·서월랑이 뻗어 나와 ㄷ자 형태를 이루고 있고 박석을 덮은 상·하월대가 울타리를 가득 메우는 점도 동일하다. 이곳은 부재의

처리나 건물의 규모가 전체적으로 종묘 정전보다는 작지만 건축 공간 자체의 장엄한 공간 구성은 여기서도 잘 나타나고 있으며 질박하면서도 친근감 있는

장인들의 솜씨는 이곳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이사진은 니콘 D-300, 탐론 18-270 렌즈로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