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서울·경기·인천

[강화]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절집, 전등사 둘러보기

by 柔淡 2014. 5. 8.

전형적인 산지 가람배치를 따르고 있는 전등사는 보물 제178호인 대웅전이 정남을 향하고 있다. 그 왼쪽 옆으로는

대웅전과 같은 형식으로 지은 약사전이 있어 마치 두 채의 대웅전을 보는 느낌이다. 1880년에 조성한 대웅전의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 법화경 목판 104매, 중국 북송 때 주조한 범종, 고려시대 유물로 보이는

청동물동이, 대웅전에 불을 밝혔던 옥등이 값진 유물로 남아 있다.

전등사에 관한 기록은 고려 원종 5년(1264) 5월 삼랑성 가궁궐에 불정도량과 오성도량을 4개월간 시설케 하고 법회를

열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처음이지만, 이때까지도 '전등사'라는 절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이곳에 가궁궐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왕실과 매우 가까운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승(僧) 인기(印奇)에게 부탁해 바다 건너 송나라에 들어가 대장경을 인출해다

'전등사'에 보관케 했다"는 기록이 비로소 나오는데, 그 주인공이 충렬왕비 정화궁주1)였다.

목은 이색(1328∼1396) 또한 전등사가 정화궁주의 원찰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정화궁주가 송나라에 스님을 보내 대장경을 인출해 오던 시기는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한지 12년 뒤인 1282년이었다.

이로써 고려 고종이 삼랑성에 세웠다는 그 가궁궐이 그대로 전등사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또 하나 정화궁주가 옥등을 시주해 전등사라 불렀다지만, 그보다 진리의 등불은 시공(時空)에 구애됨 없이 꺼지지 않고

전해진다는 불교 본래의 의미로 '전등사'(傳燈寺)라 불렀음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숙종 4년(1678), 조정에서 실록을 보관하기 시작해 사고(史庫) 역할을 하면서 전등사는 조선왕조와 더욱 깊은 연관을

맺게 된다. 1707년 강화유수 황흠은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 이름했으며, 이곳을 왕조실록과

왕실의 문서를 보관하는 곳인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한다.

 

전등사의 최고 스님에게 도총섭의 직위를 부여한 것은 1719년부터 1910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으레 전시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749년에는 도총섭을 지휘자로 중수불사를 했는데, 이때 대조루도 함께 건립되었으며, 대개 영조의

시주로 이루어졌다. 고종 8년(1871)에는 전쟁에 대비한 무기보관소 포량고(砲糧庫)를 두었으며, 이듬해에는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고, 왕실에 진상하는 약초를 보관하기 위해 진상약애고(進上藥艾庫)와 산성별장소(山城別莊所)를 설치하였다.

산성별장소는 산성을 수비하는 종9품의 무관이 항시 주둔하는 곳이었으니, 신미양요·병인양요를 맞아 군비를 더욱 강화하고

왕실을 튼튼히 하려는 것이었다.

경내에는 그때의 장사각터, 선원보각터, 군창터 등이 남아 있어 특히 전시에 특수기지 역할을 했던, 강도 시대에 격동의

역사와 함께했던 전등사를 보는 듯하다. 고려 가궁궐터로 추정되는 곳도 요사채 위쪽으로 있다.

전등사는 일제 강점기인 1912년, 전국 6개군의 34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이었다. 그런데 그 관리가 만만치 않아 드넓은

절터를 팔아 없애는 지경에 이르러 오늘날의 전등사로 축소되었다.[네이버 지식사전 인용]

 

 연등이 설치된 전등사 대웅전

보물 제178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으로 손꼽힌다. 특히, 건물 내부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하고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 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더욱 희귀한 것은 물고기를 천장에 양각해 놓아 마치 용궁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닫집 왼쪽 천장에는 양쪽에 용두장식을

하고 몸체에 용틀임을 한 작은 용가(龍架)의 배 부분에 아홉 개의 방울을 달아 놓고 끈을 달아 불단까지 늘여놓아 이를 잡아 흔들면

아홉 개의 방울이 동시에 울어 구룡토음의 장관을 이루게 했던 적도 있었다.
내부에 있는 유물로는 석가여래 삼존과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법화경>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1621년(광해군 13)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 형식의 목조 건물이다. 정면 3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같은 길이로 나누어 빗살문을 단 형식이다. 좌우 옆면은 벽이나 앞 1칸에만 외짝으로 문이 있다. 기둥은 대체로 굵은 편이며 모퉁이 기둥은 높이를 약간 높여서 처마 끝이 들리도록 했다.
대웅보전의 외관상 특징은 우선 비슷한 시기의 다른 건물에 비해 약간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곡선이 심한 지붕과 화려한 장식(나부상, 동물 조각, 연꽃 조각 등)이 그런 특징을 잘 보여 준다.

 

그중 나부상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데 이날은 연등에 넋이 나가 나부상과 수미단을 찍지 못했다.

나중에 다시한번 오라는 부처님의 깊은 뜻이....

 

남문에서 오르다 보니 가장 먼저 눈에띄는 건물이 설법전이다.

설법전은 내외부가 초현대식 건물인데 지하로 건축되어선지 오래된 건물들과 어울려 튀지 않지만 독특하긴 하다.

 

 

 

 

 설법전 내부

 

 

 

 

 

 적묵당은 스님들이 참선하던 선원이었다. 지금은 스님들의 숙소와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전등사 템플스테이 장소인데 설법전 위에 있다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전등사 범종이 보관된 전각이다. 본래 이 범종은 대조루 옆 종루에 보관된 것이었으나 2004년에 적묵당 옆 종각으로 옮겼다.

 

 약사전 옆의 서남쪽에 세워진 명부전도 정확한 창건 연대는 밝혀지지 않는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상을 비롯해, 시왕·귀왕 등 모두 29존상이 모셔져 있다. 대개 명부전은 지장전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죽은 이를 재판하는

시왕이 있는 곳은 명부전, 지장보살을 모셨을 경우에는 지장전이라고 부른다.

이 전각은 죽은 사람들이 49일이 지나 재판을 받을 때까지 그들의 넋을 위해 치성을 드리는 곳이다.
지장보살은 모든 중생이 극락을 가기 전까지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노라는 원을 세운 보살이다. 그래서 지장보살은 녹색의 머리를 깎고

주장자를 짚은 채 지옥 문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처럼 명부전에는 부처님 원력으로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제사의 공덕으로 극락을 가라는 정성어린 마음이 담겨 있다.

 보물 제179호로 지정된 약사전은 대웅보전 서쪽에 위치하는 건물로 대웅보전과 거의 같은 양식의 건물이다.
조선 중기 다포계열의 정면 3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기둥을 설치하였으며, 정면 각 기둥 위에는 공포를 배열하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공간포(기둥과 기둥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공포)를 설치하였다.
내부 천장은 중앙 부분에 우물천장을 두고 주위에는 빗천장을 만들었으며, 거기에 돌아가면서 화려한 연화당초문을 그려 놓았다.

대웅보전과 함께 지붕을 수리했다는 기록 말고는 다른 기록이 없어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건물의 겉모습이나 내부 장식도

 대웅보전과 비슷하다. 고려 말기나 조선 초기에 석조로 조성한 약사여래상을 모시고 있다.

이 약사여래불은 최근 금박으로 개금되어 있다.

 명부전과 종각 사이의 계단을 오르면 아담한 전각이 세워져 있다. 비교적 근래에 세워진 극락암 건물은

전등사 조실이었던 서운 큰스님과 상묵 큰스님이 열반할 때까지 머무신 곳이다

 

 

 

 

 

전등사에는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전등사 범종과 근래에 만들어진 범종 등 두 개의 종이 있다. 이 두 범종을 보관하기 위해

종각과 종루로 이름을 달리하여 두 개의 범종각을 세웠다. 현재 대조루 옆의 종루에는 보물로 지정된 범종이 있었으나

2004년에 명부전 앞의 종각으로 옮기고 지금은 일반 범종이 보관돼 있으며 조석 예불 때 사용된다 

여기에도 세월호 탑승자들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염원이....

 

 

  

 염하수로가 내려다 보인다.

 

 

 

 

 

 남동쪽으로는 멀찌감치 강화해협이 내려다보인다. 강화해협은 일명 ‘염하’라고도 부르는데 이 염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전등사 대조루이다.
전등사의 남문이나 동문으로 올라와 두 길이 합치는 지점에 이르면 2층 건물이 보이고 1층 이마에는 ‘전등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 건물이 바로 전등사의 불이문 구실을 하는 대조루이다.
지금의 대조루는 1932년에 중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건물 자체가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며 전등사의 여러 건물 중에서도

아주 소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조루에서 대웅전을 바라볼 때의 시선은 25도쯤 위쪽으로 향하게 된다. 대웅전의 석가모니불을 가장 존경하는 시선으로 보게 하는 각도로, 이런 부분까지 섬세하게 고려해 지어진 건물이 대조루이다.
대조루에는 1726년 영조 임금이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서 썼다는 ‘취향당’이라는 편액을 비롯해 추사가 쓴 ‘다로경권’ 등 많은 편액이

보관되어 있다.
본래 대조루는 기도를 하거나 법회를 열던 공간이었으나 지금은 불교 서적과 기념품 등을 파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다. 인천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어 있는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