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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광주·전라

[완도]고산 윤선도원림 2 - 낙서재와 동천석실

by 柔淡 2015. 2. 25.

곡수당을 돌아보고 바로 위쪽에 있는 낙서재로 올라간다. 

『보길도지』에 따르면, 처음 이곳에 집을 지을 때는 수목이 울창해서 산맥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사람을 시켜 장대에 깃발을 달고 격자봉을

오르내리게 하면서 그 높낮이와 향배를 헤아려 집터를 잡았다고 한다. 이렇게 잡은 낙서재 자리는 보길도 안에서 가장 좋은 양택지라고 한다.

세연정이 놀이의 공간이었다면 낙서재 부근은 강학하고 독서하면서 즐거움을 얻고 은둔하고자 하는 선비의 생활공간이었다. 윤선도는 낙서재

터 뒤편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소은병()이라 불렀다. 소은병이란 원래 주자가 경영한 중국 복건성 숭안현 무이산의 대은봉()

건너편에 있는 봉우리 이름으로, 윤선도는 산속에 은거하며 학문에 몰두한 주자의 행적을 따른다는 뜻에서 자기 거처 뒤의 바위에 이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소은병 바위 위에는 삼각형의 홈이 크게 파여 있어서 빗물이 고이면 바위벽을 타고 흘러내리게 되어 있다. 윤선도는 숲이

빽빽한 이 부근에 나와 사색에 잠기곤 했다고 한다.

 낙서재 앞에는 거북바위가 있어서 저녁이면 윤선도가 거기에 앉아 달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윤선도는 67세에 거북바위 남쪽에 무민당을 짓고

못을 판 후 연꽃을 심었으며 낙서재와 무민당 사이에 각각 한 칸짜리 동와와 서와를 지었다. 82세 때는 아들 학관에게 시켜서 낙서재 동쪽

계천가에 곡수당을 짓고 역시 연못을 만들었다. 그밖에 동쪽 언덕에는 윤선도의 자제들과 문인들이 거처하던 정성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

곡수당 옆으로 흐르는 계천은 물 흐르는 소리가 옥이 구르는 듯하다고 해서 낭음계라고 불렀는데, 이로 인해 낙서재와 무민당, 곡수당 등이

있는 주변을 통틀어 낭음계정이라 부르기도 한다. 낭음계 주변은 소나무와 삼나무가 울창하고 깨끗한 암벽들이 있어서 윤선도가 때때로

죽장을 짚고 소요했다고 하며, 술잔을 물 위에 띄워 놓고 시를 지으며 노는 유상곡수연()을 벌일 만한 곳과 목욕을 하기 알맞은

목욕반()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다.

[네이버 지식백과] 보길도 부용동 정원 (답사여행의 길잡이 5 - 전남, 초판 1995, 23쇄 2010, 돌베개)

동천석실

낙서재에서 마주보이는 앞산 기슭에 있다. 낙서재가 부용동의 연꽃 같은 지형의 화심쯤에 있다면 동천석실은 맞은편으로 벌어진 꽃잎의 허리쯤

에 있는 셈이다. 동백나무나 차나무 등 활엽수 사이에 자귀나무가 드문드문 섞인 숲 사이 오르막길로 10분쯤 걸어올라가면 위쪽 높은 곳에

커다란 바위들이 불쑥불쑥 드러나 있는데 그 위가 동천석실 자리이다.

 

지금은 1993년에 복원된 네모 반듯한 정각이 세워져 있다. 집 자체가 바위들 사이의 좁은 터에 서 있고 바위들이 주위를 빙 두르고 있으며

앞과 옆은 낭떠러지이므로 요새나 전망대 같은 느낌을 준다. 이곳에 오르면 부용동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주변의 산자락이 낙서재터를

둘러 연꽃잎처럼 피어나 있어서 부용동이라는 동네 이름을 실감하게 한다. 동천석실이라는 이름은 신선이 사는 곳을 동천복지라고 부르는

데서 연유했다. 과연 이곳에 있으면 세상을 발 아래로 보면서 훨훨 초탈한 듯한 기분이 든다. 윤선도는 이곳에서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진

세상’을 내려다보며 신선의 경지를 노래했던 듯한데, 옹졸한 선입관 때문인지 어딘가 분재나 모형을 보고 애써 즐기려 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내려다보는 기분이 속속들이 활연하지는 않다.

윤선도는 석실 근처의 반석 위에서 차를 달이기도 했고 또 바로 앞에 있는 두 바위 사이에 도르래 장치를 해놓고 산 아래와 줄을 연결하여

필요한 물건이나 음식을 날라오기도 했다고 한다.

“공(윤선도)은 이곳을 몹시 사랑하여 부용동 제일의 절승이라 하고 그 위에 집을 짓고 수시로 찾아와 놀았다. 이곳에 앉으면 온 골짜기가

내려다보이고 격자봉과는 나란히 마주하게 되며 낙서재 건물이 환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대체로 사건이 있으면 무민당과 기()를 들어 서로

호응하기도 했다. 공은 때로는 암석을 더위잡고 산행하기도 했는데, 발걸음이 매우 경쾌하여 나이가 젊은 건각들도 따라가지 못했다 한다.”

(『보길도지』)

동천석실로 올라가는 급경사 아래 오솔길 가에는 바위 틈에 자그마한 세모꼴 연못이 있는데 요즘도 수련이 떠 있다. 연못 아래쪽 바위 밑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그곳으로 물이 흘러나가며, 오솔길 건너편에도 다른 연못이 있었던지 석축으로 둘러 놓은 흔적이 있다. 연못 위쪽에

드러난 널따란 암반 귀퉁이에는 딱 한 사람이 걸어갈 만한 폭으로 계단이 패어있다. 연못의 배수구가 뚫린 바위는 그 돌계단으로 올라가는

통로이기도 한데, 윤선도는 여기에 희황교()라는 이름을 붙였다. 희황은 중국의 황제 복희씨를 말한다. 윤선도는 천자가 거처하는 곳에

비유할 만큼 동천석실 부근의 경관을 흡족하게 여겼던가 보다.

[네이버 지식백과] 보길도 부용동 정원 (답사여행의 길잡이 5 - 전남, 초판 1995, 23쇄 2010, 돌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