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창덕궁을 관람해 보니 궁궐도 나름대로 역사성이 있어서 볼만했지만 낙선재부터 시작되는 후원이 아주 인상 깊었다. 예전엔 비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졌지만 궁궐을 안내하시는분의 말씀은 그 명칭은 일제가 붙였으니 후원이나 금원, 북원으로으로 불러야 한다고 강조를 하신다.
후원을 돌아보면서 봄과 가을에 꼭 한번 다시 와보겠다는 다짐을 했다.
후원은 낙선재구역, 부용정구역, 애련정 구역등 세 구역으로 나눌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부용정 구역이 가장 마음에 든다.
창덕궁 후원을 '비원(秘苑)'이라고도 하는데, 실록에는 금원(禁苑), 후원(後苑), 북원(北苑) 등 표현이 많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는 상림(上林)이라 표현되기도 했다. 비원이란 이름은 광무(光武) 8년(1904) 7월 15일 기록에서부터 보인다.
후원의 면적은 약 9만여평에 이른다. 북악(北岳)의 동쪽 봉우리인 응봉(鷹峰)에서 남으로 뻗어 내린 용같은 산줄기 중간에 후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능허정(凌虛亭)이 있는 언덕(표고 98m)이 제일 높은 지역이다. 임진왜란 이후 20여년간을 폐허로 있다가 광해군에 의하여 복구되었다.
후원에는 17개 동의 정자(亭子)가 있는데 연산군때 건물로 농산정(籠山亭)이 있고, 인조때 건물로는 청의정, 소요정, 태극정, 취규정, 희우정(喜雨亭), 존덕정이 있다. 숙종때 건물로는 영화당, 사정기비각, 애련정(愛蓮亭), 능허정, 청심정(淸心亭), 취한정(翠寒亭), 괘궁정(掛弓亭), 몽답정(夢踏亭)이 있으며, 정조때는 주합루, 서향각, 부용정이 있고, 순조때는 의두각, 기오헌, 연경당, 농수정이 있으며 조선말 일제 초의 건물로 승재정, 관람정이 있다.
연못으로는 부용지, 애련지, 반월지(半月池), 관람정 앞 연못, 몽답지, 빙옥지(氷玉池), 연경당 앞 방지(方池, 원래 魚水堂의 방지임)가 있다. 식물은 160여종에 297,000여주가 서 있으며 300년이 넘은 느티나무, 주목, 음나무, 회화나무, 산뽕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 194호로 지정된 다래나무와 천연기념물 제 251호로 지정된 향나무도 있다.
괴석(怪石)은 크기가 사람의 키보다 모두 작은데, 정자 옆이나 연못가, 집안 담장 옆이나 후원의 화계에 배치되어 있다. 옥류천의 소요암에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던 곡수구(曲水溝)도 조성되어 있다. 후원의 수목은 계절 변화에 민감하게 변한다. 봄이면 신록이 움트고 여름이면 녹음이 우거지고 가을이면 단풍이 곱게 타며, 겨울에는 손시린 나목(裸木)과 설경이 아름답다.
후원은 제왕이 수학(修學)하고 수신(修身)하면서 치도(治道)를 닦고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어진 정치를 하기 위한 휴식처이기도 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세계적인 명원(名苑)으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낙선재에서 후원으로 가는길
부용정과 부용지
동쪽에 열린 문을 열고 들어서면 불발기창이 달린 창과 외짝의 문이 있다. 그 안에 들어서면 단문이다. 필요할 때 문짝을 열어 걸면 온 천지가 한꺼번에 정자 안으로 달려드는 듯하다. |
부용지의 수원(水源)은 지하에서 솟아오르며, 비가 올 때는 서쪽 계곡의 물이 용두의 입을 통하여 입수하게 되어 있다. 못 속에는 잉어나 붕어 등의 물고기를 길러 임금이 낚시나 뱃놀이를 했던 곳이다. 동남쪽 호안(護岸)에는 이채롭게 물고기 한 마리가 조각되어 있다 |
주합루와 어수문
주합루 남쪽에 어수문을 짓고 그 앞에 방지(부용지)를 팠다. 방지의 중앙엔 당주(當洲)를 만들고 잘 생긴 소나무를 심었다. 연못에 당주가 있어야 재록(財祿)을 누린다는 설에 따른 것이다. 방지의 서편엔 누각이 있고 지변(池邊)에 입수하는 물을 토하는 이무기 머리상이 있다. 동쪽엔 영화당이, 남쪽엔 부용정이 있다. |
영화당
조선왕조에선 옛 제도에 따라 국가의 동량(棟梁)을 뽑는 일을 과거제도에 의존하였다. 공개시험으로 우수한 인재를 발탁하는 방법이었다. 지방에서 초시에 합격한 사람들만 골라 임금이 친히 참석한 자리에서 시험을 치게 하였다. 이를 전시(殿試)라 하는데, 영화당은 그런 과거를 보는 장소였다. 원래 이곳은 임금이 신하들과 꽃구경을 하고 시를 지으며 놀던 곳이다. 정조 때부터 이곳을 과거장으로 사용하여, 영화당에는 시관이, 그 앞 춘당대에는 응시자들이 자리잡고 과거를 보았다
앙부일구 (해시계). 영화당 앞에 있다.
앙부일영(仰釜日影)이라고도 한다. 네 발 달린 반구형(半球形)의 솥처럼 생겼기 때문에 앙부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것은 〈원사 元史〉 천문지(天文志) 앙의(仰儀)에 있는 곽수경법(郭守敬法)에 의해 만들었다고 하나 앙의와는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세종 때 처음 만들었으며 이후 조선말까지 계속해서 만든 대표적인 해시계로 공중용으로 설치해놓는 것과 작게 만들어 휴대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한국과학사). 이 오목형 해시계는 일본에도 전해져 많은 유물이 남아 있으나 중국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증보문헌비고 增補文獻備考〉 상위고(象緯考) 의상(儀象)에 의하면 세종의 명으로 정초(鄭招)·정인지(鄭麟趾) 등이 고전을 연구하고, 이천(李)과 장영실(蔣英實)이 공역(工役)을 감독하여 1438년(세종 20)에 앙부일구를 비롯한 여러 천문의기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김돈(金墩)의 앙부일구명(仰釜日晷銘)에는 "무릇 시설 중에서 시간에 관한 것보다 더 중대한 것은 없다. 밤에는 경루가 있으나, 낮에는 시간을 알기 어렵다. 구리를 부어서 그릇을 만들었는데 모양이 솥과 같다. 지름에 둥근 송곳을 설치하여 북에서 남으로 마주 대하게 했으며, 움푹 팬 곳에서 휘어져 돌게 했고, 점을 깨알같이 찍었다. 그 속에 도(度)를 새겨서 반주천(半周天)을 그렸다. 시신(時神)을 그린 것은 무식한 백성을 위한 것이며, 시간이 정확하고 해 그림자가 명백하다. 길가에 놓아두니 구경꾼이 모여든다. 이로부터 백성도 이것을 만들 줄 알게 되었다"고 앙부일구에 대해 적고 있다. 공중용 앙부일구는 2개를 만들어 종묘 남쪽 거리와 혜정교(惠政橋)에 돌로 대를 쌓고 그 위에 설치하여 일반 백성들이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이때의 앙부일구는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18세기 전후의 작품들이 현존하여 궁중유물전시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 2기가 현재 보물 제845호로 지정되어 있다. 앙부일구의 재료는 보통 청동이지만, 자기나 돌을 깎아 만든 것도 있다. 공중용 앙부일구는 보통 30~40cm 정도의 크기이다. 앙부일구는 그림자를 만들기 위해 끝이 뾰족한 막대[影針]를 쓰는데 이것도 보통 청동으로 만든다. 영침의 길이는 앙부일구 지름의 절반이 된다. 영침의 끝을 앙부일구의 중심에 오도록 하며 그 방향은 천구의 북극을 향한다. 앙부일구의 안쪽면에는 절후선(節候線)이라는 13개의 위선이 있고, 시각선(時刻線)이라는 여러 개의 경선이 그어져 있다. 시각선과 절후선은 항상 서로 직교한다. 절후선의 가운데 있는 춘추분선은 천(天)의 적도면과 일치하는 대원(大圓)이 되며 나머지 12개의 절후선은 적도에 평행하다. 태양의 고도가 여름에는 높아지고 겨울에는 낮아지므로 절후선에 닿는 그림자의 위치로 시간뿐만 아니라 그해의 절기를 알 수 있다. 청동으로 만든 앙부일구에서는 절후선이나 시간을 나타내는 글씨를 칼로 홈을 파고 은으로 상감했다. 앙부일구의 영침의 위치는 관측 지점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대개는 윗면이나 옆면에 한양북극고도(漢陽北極高度) 또는 북극출지(北極出地)의 도수로서 표시하고 있다. 휴대용 앙부일구로 유명한 것은 1874년(고종 8)에 강건(姜健)이 납석(蠟石)으로 만든 것이 있다. 4~6cm 정도 크기의 직육면체 상자에 반구를 파고 그 안에 영침을 세웠다. 또한 방향을 쉽게 정할 수 있도록 자침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이밖에 청동제나 상아로 만든 앙부일구가 상당수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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