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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고궁,사찰,기타)

소쇄원 1 (06. 02. 11)

by 柔淡 2006. 2. 12.

2. 11 (토). 남도여행

 

처음 계획은 새벽 4시쯤 출발해서 임실 옥정호에 들러 일출을 본다음 내장과 백양의 설경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려고 했다. 일기예보를 보니 흐리고 안개가 낀다고 하니 굳이 옥정호에 일찍 가봐야

안개 구경만 할것 같다. 어젯밤 늦게 잠든 데이지가 힘들게 일어나 준비를 마치니 새벽 5시반.

경부고속도로 수원인터체인지로 들어가 천안 - 논산 고속도로를 지나 여산휴게소에 도착하니

7시다. 아침을 간단하게 먹고 출발 하려는데 데이지가 카메라 메모리를 하나도 안챙겨 왔단다.

예비 배터리는 아침에 내가 챙겨줬는데 디카 메모리는 컴퓨터와 연결하는 리더기에 꽂아두고

그냥 온것이다.

 

때는 아침 7시 30분, 아무데서나 파는것도 아니고 내것과는 맞지도 않고 참으로 황당했다.

화나는 대로 하면 나혼자 마음껏 찍고 약을 좀 올려야 하는데 꼭두새벽에 멀리 전라도까지

와서 빈카메라만 들고 왔다갔다 해야 할 옆지기를 생각하니 마음이 안좋다.

머리를 굴려보니 광주에 가면 전자상가가 있을것이고 시간도 대충 맞을것 같다.

미안해 하던 데이지가 갑자기 생기가 돌면서 광주 시외버스터미널 옆에 전자상가가 있단다.

그러고 보니 몇년전 장성 상무대에 살때 거기서 컴퓨터를 산 기억이 난다.

물어물어 도착하니 8시 50분, 금호전자상가가 있고 그곳에서 디카와 관련부품을 판단다.

그런데 개장시간은 9시 30분, 하릴없이 30~40여분을 기다려야 한다.

한참을 기다린후 문을 열자마자 뛰어 들어가 용량 512메가짜리 CF메모리를 서울보다 만원정도

비싸게주고 사서 카메라에 끼워보니 작동이 잘된다. 겉으론 전에도 그랬으니 오늘은 사진 안찍고

그냥 따라만 다닌다고 하더니 안으로는 무척이나 속이 상했던 모양이다.

 

하긴 몇년전 나도 평창 자생식물원에 꽃사진 찍으러 갔는데 가보니 카메라 가방을 안가져가서

애꿎은 데이지에게 신경질을 냈던 기억이 난다. 이제야 그때의 빚을 갚은것 같다.

10여일후 중국에 여행가는 옆지기를 위해서 어차피 예비 메모리를 하나 더 사줘야 했는데

이번엔 메모리를 안가져가는 걸로 자해를 해서 메모리 한개를 더 챙기는 데이지.

이런 옆지기와 계속 살어말어? 경매에 붙인다고 했더니 웃돈을 더줘도 안팔릴 거란다.

사실 속으론 늙어서 안쫒겨 나려면 이번이 절호의 찬스다 라고 생각하며 한없이 마음 넓은척

했다. 낼 모레면 나이 50인데 그정도 건망증은 누구나 다 있다고 위로 하면서. ㅎㅎㅎ 

    

광주엔 아침부터 보슬비가 내린다. 백양사로 출발 하려는데 데이지가 새로운 제안을 한다.

백양산과 내장산은 많이 가봤고 이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소쇄원으로 해서 담양에 갔다가

임실로 가면 좋지 않겠냐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날씨가 흐려 내장이나 백양에 가봐야

제대로 경치를 즐기지 못할것 같다. 처음부터 내장과 백양은 시간이 되면 가려고 했던곳이고

 

전에 한번 가본적이 있지만 제대로 보지 못해서 그렇게 하는것도 좋겠다는생각이 든다.

다시 고속도로를 달려 동광주 인터체인지로 나가 좌회전해서 담양방향으로  5분쯤 달리니

삼거리가 나오고 우측으로 가면 소쇄원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저간의 이런저런 복잡한 사건이 뜻하지 않게 소쇄원을 찾은 연유이다.

덕분에 하루동안 용인 수지 - 광주 - 소쇄원 - 가사문학관 - 식영정 - 광주댐 - 명옥헌 - 담양

메타세콰이어길 - 죽록원 - 관방제림 - 담양호 - 섬진강댐 - 옥정호- 전주를 거치는,

짧은 시간에 아주 많은곳을 돌아보는 여행이 되었다.           

 

소쇄원 가는길

안내도

 

 

소쇄원 소개 (http://www.soswaewon.org/mainFrame.asp)

 

소쇄원은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 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원림이다.
1981년 국가 사적 304호로 지정된 한국민간 정원의 원형을 간직한 곳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경외와 순응, 도가적 삶을 산 조선시대 선비들의 만남과 교류의 장으로서 경관의 아름다움이 가장 탁월하게 드러난 문화유산의 보배이다.
전체적인 면적은 1400여평의 공간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조성된 건축물, 조경물은 상징적 체계에서 뿐만 아니라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절묘하게 이뤄내며, 그 안에 조선시대 선비들의 심상이 오롯이 묻어나 있는 공간이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봉대와 광풍각 그리고 제월당이 있으며, 긴 담장이 동쪽에 걸쳐 있고, 북쪽의 산사면에서 흘러내린 물이 담장 밑을 통과하여 소쇄원의 중심을 관통한다. 소쇄원의 주요한 조경수목은 대나무와 매화, 동백, 오동, 배롱, 산사나무, 측백, 치자, 살구, 산수유, 황매화 등이 있으며, 초본류는 석창포와 창포, 맥문동, 꽃무릇, 국화 등이 있다. 조경물로는 너럭바위, 우물, 탑암과 두 개의 연못이 있으며, 계곡을 이용한 석축과 담장이 조화로운 곳이다.
이러한 공간의 조성은 조선중종때의 선비인 소쇄공 양산보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그 정확한 조영시기는 1520년대 후반과 1530년대 중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정유재란으로 건물이 불에 타기도 했지만 다시 복원 중수하고 현재까지 15대에 걸쳐 후손들이 잘 가꾸어 나가고 있는 조선 최고의 민간정원이라 할 수 있다.

 

소쇄원을 만든 사람은 양산보라는 사람으로 1503년에 태어나 1557년 생을 마감한 이다.

15살에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는데 스승이 바른 정치를 구현하다 기묘사화(1519년)에 연루되어 화순 능주에서 귀양을 살다 사약을 받고 죽게되자 17살에 고향으로 돌아와 평생 세상에 나가지 않고 은둔, 처사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다.

이는 선비가 불행하게도 때를 만나지 못하면 도를 마음에 담아둘 뿐 펼치지 못하며 교화는 자신의 집안으로만 그치고 넓혀지지 못한다는 옛적의 말을 볼 때 그로 인해 양산보는 선비의 큰 뜻을 펴지 못하였으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학문에 힘쓰며, 지역의 선비와 교류하고 나무와 화초를 가꾸고 원림을 조성하며 바른 삶을 살아간 선비의 본보기가 되었던 사람이었음을 알수 있다.


이 소쇄원을 만든 주인 양산보는 후손에게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것이며, 후손 어느 한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유훈을 남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지역이 정유재란때 왜적들의 집중적인 공략을 받았기 때문에 소쇄원의 건물들이 불에 타버리고 주인의 손자인 양천운이 다시 중건하게 된 기록이 남아있으며, 5대손인 양경지에 의해 완전 복구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소쇄원은 은둔을 위한 정자이지만 그의 곧은 뜻을 알게된 사림들은 소쇄원을 중요한 공간으로 인식하고 주인과 교류를 하게 됨으로서 열린 공간으로 호남 사림의 명소가 된 것이다.
소쇄원 주인과 교류하였던 인사들의 면모를 보면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선비들이었다.
이후 소쇄원은 양산보의 유훈대로 후손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15대에 이르고 있다.

 

입구

 

 

 

 

 

제월당 광풍각등 소쇄원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