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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고궁,사찰,기타)

소쇄원 2 (06. 02. 11)

by 柔淡 2006. 2. 13.

소쇄원에는 제월당, 광풍각, 대봉대 등의 전각과 담장, 대나무숲, 계곡 등이 절묘하게 배치되어 있다. 건물이나 계곡 등 모든 구성요소마다 깊은 의미와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 후대 사람들의 감상이 전해 내려온다.

  

 

제월당

 

제월당은 정자라기 보다는 정사精舍의 성격을 띄는 건물로 주인이 거처하며 조용히 독서하는 곳이었다. 당호인 제월霽月은 ‘비 갠 뒤하늘의 상쾌한 달’을 의미한다. 그러나 「소쇄원도」에 나타난 제월당이나 광풍각이 48영이나 『유서석록』에는 나타나지 않아 흥미롭다. 물론 광풍각이 48영이나 유서석록의 소재로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제월당은 『유서석록』이 제작된 당시인 1574년에는 아직 건립되지 않은 것이 아니냐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소쇄원의 내원內園에 있는 요소들은 「무이구곡」에서 소재로 삼았을 법한 것들이 많은데, 즉 「무이구곡」에서 비롯되어 무이정사를 경영하였던 예와 같이 제월당은 4~5곡 간에 정사를 둔 것으로 구곡경영에서 그 예를 볼 수 있겠다.

 

그 건축형태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인 팔작지붕의 한식기와 건물이다.
광풍각의 배면에 여러개의 단을 올려 주거형식으로 건축하여 전면에 마당을 두었다. 좌측 1칸은 다락을 둔 온돌방이며 중앙칸과 우측 1칸은 장귀틀과 동귀틀을 갖춘 우물마루구조인데, 전면과 좌측면은 개방되어 있는 반면에 뒷면은 판벽과 판문으로 되어 있다. 기단은 막돌허튼층쌓기한 높이 1.3m의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웠으며, 도리와 장혀, 보아지로 결구된 평5량가구이다. 천장은 연등천장과 우물천장을 혼합한 형태로 서까래가 모이는 부분에는 눈썹천장으로 되어 있으며, 처마는 홑처마이며 추녀 끝에는 팔각의 활주를 세우고 합각부분에서 우미량 형태의 충량이 보와 연결된다. 제월당은 소당小堂, 고당高堂이라 불리기도 한다.

 

 

 

 

 

 

 

 

 

 

 

 

 

광풍각

 

양산보가 계곡 가까이 세운 정자를 광풍각이라 하고 방과 대청마루가 붙은 집을 제월당이라고 한 것은 송나라 때 명필인 황정견이 춘릉春陵의 주무숙(1017~1073)의 인물됨을 얘기할 때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맑음이 마치 비갠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도 같다'라고 한 데서 따온 이름이다. 어찌보면 처사로서 양산보의 삶이 마음이 맑고 깨끗함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고경명의 『유서석록』에서 계류 가에 있는 문방을 ‘마치 화방畵舫(채색치장을 한 유람선)과 같다’라고 하고 했던 것은 「무이도가」의 세 번째 노래에서 가학선架壑船(절벽에 걸친 배)에 비유하며 그렇게 묘사한 것은 아닐까 추정된다.
즉 ‘가학선’은 상상컨대 옛날 큰 홍수로 배가 높은 곳에서 떠내려와서 물이 빠지자 땅에 닿았으며, 세월이 흘러 썩어서 허물어졌는데 마침 산곡에 이것이 있는 까닭으로 해서 ‘상전해수’라는 말을 썼다는 것이다.

 

「소쇄원48영」에서 광풍각을 소재로 한 것으로 제 2영 ‘침계문방枕溪文房’은 머리맡에서 개울물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선비의 방이라는 뜻인데, 시귀에 의하면 ‘창은 밝고 첨대는 맑으니 그림과 글씨가 수석水石에 비치네, 뒤엉키는 착잡한 이념, 솔개와 물고기인 양 떠돈다.’라 하여 동창이 밝아진 계곡 주변 문방에서 느끼는 심경을 표현하고 있다.
1574년에 쓰여진 『유서석록』에는 광풍각이라는 명칭은 쓰여지지 않고 ‘소제小齋’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1614년에 양천운이 쓴「소쇄원계당중수상량문」에는 계당溪堂을 ‘침계문방’ 혹은 ‘광풍각’이라고 같이 쓰고 있어 광풍각이 바로 ‘침계문방’ 임을 알 수 있다. 제월당이 주인을 위한 집이라면 광풍각은 객을 위한 사랑방이라 할 수 있다. 이 상량문에 의하면 광풍각은 1597년 불에 타버리고 1614년 4월에 중수하였다. 또한 ‘계당’은 광풍각의 별칭으로 또 다른 시기에는 침계헌, 침계방, 수함水檻, 소함小檻 등으로 부르는 별칭이 있다.

광풍각은 소쇄원의 하단에 있는 별당으로 건축된 정면 3칸, 측면 1칸 전후퇴의 팔작지붕 한식기와 건물이다. 중안 1칸은 온돌방으로 뒷면에는 90cm 높이의 함실 아궁이가 있다. 방의 문턱에는 머름대를 구성하였으며, 문은 삼분합의 들어열개문으로 되어 있다. 막돌허튼층의 낮은 기단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웠으며, 주두와 소로, 장혀, 굴도리로 결구된 평5량가구이다. 천장은 연등천장과 우물천장을 혼합하였는데 서까래가 모이는 부분은 눈썹천장으로 되어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서까래는 선자서까래이다.

 

 

 

 

 

 

 

 

 

 

 

 

 

 

 

 

 

도오桃塢
복숭아 밭 혹은 동산으로 도오는 광풍각 뒤편 언덕 위에 있는 복숭아나무를 심은 작은 동산이다. 현재는 길이 10m, 나비 6m 가량의 넓이를 갖는 후원의 모습을 가진 공간으로서 복숭아나무느 문화재관리국이 새로 심은 것이고 배롱나무와 산수유나무가 자라고 있다. 36영은 복숭아를 심은 곳의 풍경을 표현하고 있다.

 

 

 

대봉대

사방 1칸의 초가지붕으로 되어 있는 현재의 초정 대봉대는 1985년경에 재건된 것이다. 소쇄원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이 소정은 시원한 벽오동나무의 그늘에 앉아 봉황새(귀한 손님)를 기다리는 집이다. 「소쇄원48영」의 주요한 시점의 하나로 여기에 서면 소쇄원의 모든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봉대는 귀한 손님을 맞기 위해 대를 쌓고 정자(소정)를 지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대봉대는 좋은 소식을 전해준다는 ‘봉황새를 기다리는 동대桐臺‘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그 곁에는 봉황새가 둥지를 틀고 산다는 벽오동나무와 열매를 먹이로 한다는 대나무를 심었다. 또한 입구 쪽으로는 상지와 하지가 있고 바람을 막기 위해 애양단이 바로 앞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상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쇄원48영」중 많은 구절이 적용되는 장소 가운데 한 곳이며, 제 37영 ’동대하음桐臺夏陰’에서 동대 주변의 분위기를 노래하였다. 이러한 주변의 상황으로 보아 ‘동대’란 대봉대를 가리킨다. 이 대봉대의 넓이는 4m×2.5m이다. 현재 대봉대의 초정 옆에 심어진 오동나무는「소쇄원도」에 근거해서 15대손 양재영씨가 최근에 심어 가꾸고 있다. 중국에는 봉황새가 모여 살았다는 봉황새와 봉황산이 많다

 

소쇄원 입구에서 담을 따라서 오곡문에 이르는 공간이며 작은 연못, 대봉대, 초정, 애양단 담장, 오곡류의 계류, 나무 홈대, 물레방아, 큰 연못과 오동나무, 대밭, 목백일홍 등이 있다. 특히 대봉대는 봉황이 내려앉는 곳으로 이상향에 대한 염원이며, 애양단은 따뜻한 부모의 사랑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담장

소쇄원에는 몇 개소에 담장이 둘러져 있는데 이들은 외원과 내원을 구분지어주는 경계이다. 입구에서 북동쪽을 향하여 애양단까지 약 33m, 애양단에서 북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오곡문을 지나 매대까지 약 20m, 이곡으로부터 남서방향으로 제월당까지 약 20m가 되는 ㄷ자형의 담장이 축조되어 있다. 흙과 돌로 쌓여진 담장의 높이는 2m이고 그 위에 기와가 덮여있는데 방어를 위한 폐쇄적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골바람을 막아주고 경역의 한계를 지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매대 뒤쪽에 있는 담장에는 송시열이 썼다는 ‘瀟灑處士 梁公之廬’라는 글이 있다. ‘려廬’가 의미하는 오두막이 따로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일반적으로 ‘려’라 함은 자기집을 낮추어 부르는말로 겸손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담장의 바로 뒷부분에 조그마한 단이 있는데, 이 단은 처사공의 제단이라고 전한다. 입구에서부터 애양단까지의 직선 담장에는 김인후의 48영이 새겨진 목판이 박혀 있었으나 담장이 유실되면서 없어졌다.「소쇄원48영」의 제 48영을 보면 ‘백척의 긴 담장이 가로질러 마치 병풍을 두른듯 하였으며 그 곳에는 새로운 시들을 써 붙였다’고 하여  비바람에도 든든하다 하였으니 길이가 백척이고 비바람에도 쉽게 파괴되지 않았음을 암시해 준다 할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소쇄원이 지네형국이기 때문에 담장을 쌓아 지네의 강한 기氣를 눌렀다는 애기도 있다. 한편 지네와 대응하여 소쇄원 반대편 마을 이름을 ‘닭뫼’라 부른다.

 

 

 

매대梅臺
소쇄원 내에는 지대, 매대, 대봉대, 정대亭臺, 광대廣臺, 처사대處士臺 등 여러 개의 대가 있다. 그러나 지대와 동대는 48영에는 시제만으로 이용되었고 「소쇄원도」에는 매대만이 그려져 있다.

매대는 매화나무를 심어놓은 ‘대’로써 48영에서는 달맞이를 하던 곳으로 되어 있다. 12영에 의하면 시제를 ‘매대요월梅臺邀月’ 이라 하여 매대에서 달을 맞이한다 하였다. 매대는 오곡문과 제월당 사이에 축조된 4단의 계단 중에서 상부 2단의 계단으로된 화계花階로써 길이는 약 20m이고 높이는 약 1m, 나비는 1.5m의 크기이다. 이곳에 매화나무를 심고 ‘매대’라 불렀다. 지금은 말라 죽은 선측백나무 한 그루와 소쇄원 동호인회에서 42그루의 매화나무를 심었으며, 문화재관리국에 의해 측백나무를 새로 심어 가꾸고 있다. 산수유나무도 한 그루가 있으나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때에 심은 듯하다.
원래 양산보의 사우는 명옥헌 뒤의 도장사道藏祠였는데, 대원군때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지고 제월당에 신위를 모셨다.

 

 

 

 

애양단

애양단은 겨울철 북풍을 막기 위하여 세운 단으로 손님을 맞는다는 대봉대 바로 뒤편에 위치한다. 애양단에 관한 내용은 양천운의 「소쇄원계당중수상량문」에 잘 나타나는데, 대봉대, 관덕사, 한벽산寒碧山 등이 기록되어 있다.

길이 약 10m, 넓이 약 7m의 마당을 높이 약 2m의 담장이 ㄱ자로 돌려져 남서향하고 있으며, 추운 겨울철이라도 볕이 따사롭다.
「소쇄원도」에는 이곳에 난대식물인 동백나무가 심어져 있다. 또한 『소쇄원사실』에서 소쇄공의 행적과 관련된 내용을 읽다보면 그에게서 스며나는 관념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효’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그의 관념적 동기였던 효는 겨울철 북풍을 막아주고 언제나 따뜻한 볕을 준다는 의미부여의 과정을 통하여 애양단에서 구체화된 것을 읽을 수 있다.

효에 대한 의미는 부훤당의 의미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또한 애양단은 공간의 이중적 함축을 지니고 있다. 즉 황량함을 담장으로 막아 공간감(영역성)을 주고 햇살이 담에 비쳐 따뜻한 질감을 주는 듯하다.

 

 

 

오곡문

 

오곡문은 담밑의 구멍으로 흐르는 계곡물 ‘원규투류垣竅透流’ 바로 옆쪽에 있던 협문夾門 형식으로서 담밖의 영역(외원)과 담안의 영역(내원)을 이어주는 문이었다.

현재의 문이 있었던 옛자리에 구멍만 뚫려 있는 정도이며, 이를 대신하여 담장에 글씨로 쓰여있다. 「소쇄원도」에는 약작을 건너 매대에 이르는 첫 단의 끝, 즉 담밑으로 흐르는 물길을 통과시키고 있는 담장의 주변에 오곡문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으나 「소쇄원48영」에는 제 15영에 ‘오곡류’라는 구절만 있다. 그렇다면 왜 이곳을 48영에는 오곡류라 하였고 「소쇄원도」에는 오곡문이라 했을까? 소쇄원의 내원과 외원을 통틀어 파악하고자 한다면 무이구곡적 표연에서 오곡문 부분은 오곡에 해당되기에 충분한 가능성을 지닌다.
즉 오곡문 밖에 6곡에서 9곡까지의 영역이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만약 이 추정이 옳다면 소쇄원은 외원으로 그 범역이 넓혀져야 할 것은 물론이고 오곡문의 정체와 48영의 내용도 해석을 달리해야 할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오곡의 대표적 봉우리가 은병이라고 한다면 오곡류가 흐르는 담장은 바로 그 은병과 무이의 계류를 나타내고자 했던 의미로써 수용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계곡

원규투류垣竅透流
오곡문과 연결된 담의 구멍을 통과해 흐르는 계곡물로서 48영에는 오곡류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구불구불하게 그려져 있다. 오곡문 곁의 담장 아래편에는 두 개의 구멍이 축조되어 있는데 높이는 약 1.5m이지만 나비는 1.5m와 1.8m이다. 이 누석累石에 의하여 축조된 유수구流水口를 ‘원규’라고 부르고 있다.
14영 ‘원규투류’와 15영 ‘행음곡류杏陰曲流’에 의하면 오곡문과 흐르는 계곡의 물을 노래하고 있다. 이 물은 폭포로 떨어지기도 하고 제 7영에 나타난 ‘고목’이라는 단어의 의미처럼 나무홈통을 타고 연못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조담槽潭
오곡으로 굽이쳐 흐르던 계곡물이 잠시 모인 말구유통 같은 형상을 이룬 연못을 조담이라 부른다 이 조담의 물은 다시 소폭으로 흘러내려 운치를 더한다. 25영 ‘조담방욕槽潭放浴’은 멱감는 조그마한 못의 풍경을 노래하고 있다. 21영 ‘복류전배’에도 술잔과 물이 돌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구절이 있다

 

폭포瀑佈
소폭이라고도 하고 십장폭포十丈瀑佈라고도 하는 가느다랗고 작은 폭포로서 조담에 고인 물이 떨어지며 폭포를 이룬다. 38영 ‘오음사폭梧陰寫暴’에 의하면 폭포물이 쏟아지는 모습을 ‘마치 흰 봉황이 춤추는 모습 같네’라며 노래하고 있다. 『유서석록』에도 표현되어 있다. 다른 시가에도 암폭岩暴, 신폭迅暴, 산폭山暴, 유폭流暴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연못

 

소당小堂
「소쇄원도」에는 두 개소에 방지가 표현되어 있다. 소당은 작은 방지方池(당塘)로서 물은 고목(나무로 제작해 소정과 독목교 사이에 걸쳐놓은 홈통)을 통해 공급된다. 즉 ‘원규투류垣竅透流’의 물은 조담으로 흘러 소폭을 이루거나 고목을 통하여 소당으로 공급되는 것이다. 소당의 물은 다시 넘쳐 흐르면서 수대를 돌리거나 아래쪽에 있는 방지로 모인다.
지당池塘은 경원景園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수경시설이다. 제 6영의 ‘소당어영小塘魚泳’에서는 네모난 못에 물고기가 노닐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소쇄원에는 입구와 봉사 사이에 네모진 못 두개가 만들어져 있다. 최근에 보수한 못의 크기는 상지(대봉대 아래)가 2.8×2.8m이며, 하지는 5.5×4.0m의 넓이다. 「소쇄원도」에 나타난 상 , 하 지와 위치는 같으나 크기가 원형과 같은지 알 수 없다. 이 못의 특징은 중앙에 조그마한 섬이 없는 네모난 못이라는 것이다. 같은 시대에 만든 환벽당의 못이나 1556년에 만든 경북 안동 도산서원의 정우당淨友塘도 모두 중앙에 섬이 없는 네모난 못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대나무숲

 

협로수황夾路脩篁
수황夾路이란 왕대나무를 말한다. 소쇄원 입구쪽의 대밭 사이에 난 길로서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무지개 모양의 아치를 그리는 원형을 하고 있었으나, 새마을 사업과 마을 주민들의 경운기 통과 때문에 지금은 예전의 위치에 콘크리트 다리를 놓았다. 「소쇄원도」에는 마치 투죽위교의 바로 밑에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어 거리감을 파악하는 데 혼란스러우나 실제로는 소쇄원의 입구에 협로수황이 있었다. 제 29영 ‘협로수황’은 대밭의 분위기를 표현하였다.

 

 

 

 

 

 

 

 

소나무

 

배롱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