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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고궁,사찰,기타)

가사문학관, 식영정, 명옥헌 (06. 02. 11)

by 柔淡 2006. 2. 14.

소쇄원에서 1시간 정도를 돌아본 다음 오던길로 되내려가 가사문학관으로 갔다.

가사문학관은 광주에서 소쇄원가는길 광주호가 끝나는 지점에 있는데 관공서 비슷하게

지어놔서 친근감이 들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박물관이나, 기념관 등 역사적인것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건축양식이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하다. 지자체에서 이런 건물을 지을때 좀더 심사숙고해야

다양하고 아름다운 모습의 건물들이 많이 생길것 같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가사문학관에 먼저 들려 가사문학에 대한 전시물과 해설을 미리알고

주변의 원림과 정자를 둘러본다면 훨씬 이해가 빠르고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질것 같다.

 

가사문학의 시원지를 둘러보며 우리 옛 조상님들도 같은 취미와 환경을 가진분들끼리

시공을 초월하여 서로 교유를 했다는것이 신기하고 지금 인터넷 시대엔 카페, 블로그,

동호회 활동 등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사문학관

 

 한문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던 조선 시대에 한글로 된 운문 형태에 산문적 형식을 지닌 주옥 같은 한글가사가 밀집된 곳에서 이를 체계적으로 알리고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전승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공사는 1998년 4월 10일 기공식을 시작하여 2000년 11월 11일 개관식을 가졌으며, 총 사업비 83억원이 소요되었다. 사업비는 국비 20억원, 도비 5억원, 군비 58억원을 투입하였다. 건립 장소는 한 동네의 3개의 명소가 있다는 소쇄원과 식영정, 환벽당이 인접한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지실 마을 앞이다.
이곳은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의 탄생지이자 당대 시가 시인들의 교류가 가장 활발 하였던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매일 답사객들의 발길이 멈추지 않는 곳이다.

 

 

관람의 포인트
시간이 여유가 되는 관람객은 동영상 상영이 1층 영상실(좌석 143석)에서 40분간 상영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방문하면 된다. 현장의 상세한 안내는 미리 가사문학관에 연락을 하면 자원 해설가들이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다.

 

눈여겨 볼 거리는 제 1 전시실에 전시중인 면앙정 송순에게 왕이 내린 교지와 분재기, 송강 정철의 옥배, 은배등이 흥미진진하다.

교지는 왕이 벼슬을 내리면서 옥쇄를 찍은 것인데 인주를 금으로 처리하여 아직도 황금빛을 발하고 있다. 분재기는 당시 사회상을 알수 있는 귀중한 자료인데 요즘처럼 장자 상속이 아니라 자제들에게 골고루 분배하였으며 딸과 서자까지도 재산을 분배하였음을 파악할수 있다.

송강 정철의 유물은 이전부터 세상을 떠돌던 얘기가 그가 두주불사로 술을 무척 좋아했고 이를 걱정한 선조대왕이 따로 술잔을 주면서 이 잔 만큼만 먹을 것을 권했는데 그것이 은으로 만든 잔이었다고 한다. 이에 송강은 잔이 너무 적은데 왕이 내려 주신 것이니 어찌할수 없어 은의 팽창하는 성질을 이용하여 잔을 대야처럼 크게 늘려 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은잔이 전시되면서 이런 재미있는 얘기들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옥배 또한 옥으로 만든 잔인데 잔의 아래쪽을 유심히 보면 산수화가 그려져 있다. 강가에서 사는 신선과 동자의 모습이 세겨진 이 옥배는 당대의 선비들이 꿈꾸었던 세상이 들어 있음을 알수 있게 한다

 

 

 

 

 

 

 

 

 

 

 

 

 

가사문학관 바로옆에 식영정이 있다.

바로 길옆에 보이는 건물들이 식영정인줄 알았는데 식영정은 언덕위에 있어 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식영정 소개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산 75-1 : 전라남도 지정 기념물 제 1호
식영정은 서하당의 주인인 김성원이 그의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하여 지은 정자이다. 정자의 위치는 무등산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별뫼 즉 성산이라 불리는 산 언덕위에 지은 것으로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이 눈에 잘 뵈는 곳이다. 특히 원효계곡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성산의 주변을 감싸고 있어 천혜의 경관은 수많은 시인 묵객들을 이곳으로 불러 들였다. 덕분에 식영정에서 가사문학의 백미라고 하는 성산별곡이 탄생하였으며, 이전에 식영정에서 바라보이는 아름다운 경관 스무가지를 석천 임억령을 비롯하여,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등이 시로 엮기도 했던 곳이다.
지금은 광주호가 생겨서 그 아름다운 경관의 몇 부분은 볼수 없지만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가사 문학의 산실이다.

 

식영정의 창건시기와 창건자
식영정을 창건한 연대는 소쇄원보다는 30여년 후인 1560년(명종 15년)으로 명확히 알려져 온다. 처음 식영정은 지금처럼 기와 지붕이 아닌 초가로 만든 허름한 정자였지만 훗날 후손들이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식영정을 건립한 사람은 식영정의 바로 아랫자락에서 살던 김성원이다. 김성원은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하여 식영정을 지어주고 자신은 그 아랫자락에 서하당을 짓고 살았다. 현재 식영정의 관리는 송강 정철의 후손이 하고 있는데 이는 석천 임억령이 말년에 해남으로 내려가고 이곳에서 석천에게 시문을 배웠던 송강 정철의 족적이 깃들인 것을 기억하는 송강의 후손들이 관리하면서 부터이다.
송강정과 환벽당, 식영정 이 세곳을 송강의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

 

식영정에 담긴 의미
임억령(1496-1568)이 담양부사를 그만두고 성산에 머물렀는데 김성원이 정자를 지어주면서 이름을 부탁하자, '그림자를 쉬게 함', 또는 '그림자를 끊음'이라는 의미로 [장자] 제물편에 나오는 말인 식영(息影)으로써 당호를 삼았다. 세상 영화를 일부러 버리고 산림에 묻혔던 석천, 그는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았던 선비였다. 집 이름에 담긴 뜻은 식영정을 지으면서 집 이름을 짓게된 연유를 담은 식영정기를 참고하면 된다.

 

집 주인인 석천 임억령은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 송강(松江) 정철(鄭澈) 등에게 시문을 가르쳤으며, 성산(별뫼)의 아름다운 풍경을 소재로한 식영정 이십영과 서하당 팔영 등을 지었던 분이다.

특히 식영정 이십영은 면앙정 송순,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서하당 김성원 등이 차운하였다. 임억령, 고경명, 김성원, 정철 등은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했는데, 식영정을 사선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송강 정철은 이곳에서 식영정과 서하당 그리고 성산의 주변 승경을 두고 읊은 한시들의 영향을 받아 국문시가 성산별곡을 남겼는데 이는 전원가사 또는 강호(江湖)가사의 백미로 꼽힌다.

식영정을 출입한 인물로는 면앙정 송순,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소쇄원(瀟灑園) 양산보(梁山甫),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귀봉(龜峯) 송익필(宋翼弼) 그리고 김덕홍, 김덕령, 김덕보 형제들을 들 수 있으며, 호남가단의 한 맥인 식영정 가단을 형성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현재의 관리상태와 주변 상황
식영정의 중심은 건물이 아니라 건물에서 바라보이는 주변의 경관이다. 무등산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정자의 위치는 무등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늘 감상할수 있으며, 무등에서 발원하여 내려오는 원효계곡의 물줄기를 한눈에 조망할수 있는 곳이다.
그 물줄기를 따라 흘러가는 물을 창계천이라 이름하고 바위 비탈이 심하고 물굽이가 돌아가는 곳에 병풍처럼 두른 절벽이 있어서 석병풍 이라 불리는 곳(지금은 광주호와 도로가 맞물고 있음)이 있고, 맞은편의 광주호 상류에는 일곱 개의 바위가 있는데 댐의 물이 차게 되면 물에 잠기고 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특징이 있는 노자암이 있다.
노자암이란 가마우지 바위란 뜻인데 일곱 개 바위중 하나에 노자암이라고 한자를 세기어 놓았었는데 누군가가 정으로 쪼아가 지금은 볼수 없다.

그리고 그 물줄기를 따라 흘러 가는 곳에 예전에는 백일홍 나무가 물가에 서 있어서 꽃이 만개할 무렵에는 무척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했다고 해서 "자미탄" 즉 백일홍이 춤추는 여울이라고 이름했지만 지금은 표지석에 옛 날 자미탄이었음을 알리어 주고 있을 뿐이다.
정자 자체는 매일 관리인이 청소를 하고 담양군에서도 각별하게 신경을 쓰고 있어 관리상태가 좋은 편이다.

답사의 포인트
이곳 식영정은 풍광이 매우 아름다워서 이름난 곳이 많다. 자미탄(紫薇灘), 노자암(가마우지 바위), 방초주(芳草州), 조대(釣臺), 부용당(芙蓉塘), 서석대(瑞石臺) 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광주호에 묻힌 곳이 대부분이다.
1973년에는 송강집의 목판을 보존하기 위하여 장서각을 식영정 아래에 세웠으며 부속 건물로 부용당(芙容堂)을 세웠다. 90년대에는 서하당 또한 다시 건립하여 옛 유적을 더듬어 볼수 있게 하였다.
특히 식영정에서는 그곳에서 바라보이는 경관 20가지를 더듬어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람 방법이다.

 

 

 

 

 

성산별곡

 

주변 소나무

 

 

 

 

식영정 옆에 잇는 부용당, 서하당, 장서각

 

 

 

 

 

자하당

 

 

장서각

 

 

광주호

 

식영정 바로앞이 광주호의 끝부분이다.

 

 

 

 

 

 

우리나라 곳곳의 경치좋다고 이름난곳 주변에는 음식점, 카페촌이 형성되어 있다.

이곳도 예외는 아니고....

광주호에서 담양방면으로 1km정도 가다가 우회전 하면 명옥헌 가는 팻말이 나온다.

소쇄원, 식영정, 명옥헌 등이 광주호 주변의 이름난 원림이며 정자들이다.

담양쩍으로 더가면 근처에 면앙정, 송강정 등이 있는데 길이 어긋나 이번에는 들리지 못했다.

 

명옥헌은 마을 한가운데 있어 찾기도 어렵고 차롤 들어가기도 힘든데 여름에 배롱나무가

활짝필때 오면 정말 좋을것 같다.

 

명옥헌 소개

 

오희도(吳希道, 1583-1623). 자(字)는 득원(得原), 호(號)는 명곡(明谷)
1602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3년(인조1) 알성문과(謁聖文科)에 합격하였다. 예문관(藝文館)의 관원으로 천거되었고, 기주관(記注官)을 대신하여 어전에서 사실을 기록하는 검열(檢閱)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망하였다.
오희도(吳希道)의 4자(四子) 오이정(吳以井, 1619-1655)이 자연경관이 좋은 도장곡(道藏谷)에 헌(軒)을 짓고 이를 명옥헌(鳴玉軒)이라 이름지었다. 오이정은 스스로 호(號를) 장계(藏溪)라 한 바 장계정(藏溪亭)이란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 후 100여년이 지나 정자가 퇴락함에 따라 후손 오대경(吳大經)이 다시 중수하였다.
명옥헌(鳴玉軒)은 정자 앞에 연못이 파져 있고 둘레에 적송(赤松) 및 자미나무 등이 심어져 뛰어난 조경으로 알려졌으며, 장계정(藏溪亭)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또는 뒤편에 도장사(道藏祠)라는 사당이 있었으므로, 도장정(道藏亭)이라고도 부른다.
명옥헌원림은 주변의 자연경관을 차경(借景)으로 도입한 정사(亭舍)중심의 자연순응적인 전통정원양식이지만 전(前)과 후(後)의 조선시대 전통적인 '방지중도형(方池中島形)'의 지당부(池塘部)를 도입하였다. 전(前)의 지당부는 명옥헌의 북쪽에 위치하며 그 고저차는 약 6.3m이다 동서너비 약 20m, 남북길이 약40m 크기를 갖는 방지의 중심부는 원형의 섬이 있으며 주위에 약20주의 자미나무가 심어져있는데 수령은 100여년 정도이다. 명옥헌의 동쪽에 자리잡은 지당(池塘)은 동서 16m, 남북 11m 크기이다. 이 지당은 1979년 여름에 조사 발굴된 것으로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는 계류의 물을 끌어 채운 것으로 북과 서쪽에 자미나무가 심어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정자로 실의 구성은 외부로 퇴간을 돌리고 그 중앙에 실을 둔 중앙실형(中央室形)이다. 방에는 구들을 두었고 평천장을 하였다. 마루의 외곽에는 평난간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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