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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부산·울산·대구·경상

소수서원 (07. 11. 03)

by 柔淡 2007. 11. 7.

부석사를 돌아보고 나오니 10시반쯤, 한시간 반 정도 관람한것 같다.

바쁘게 다니다 보니 부석사에서 중요한 조사당을 빼먹었다.

다음에 한번 더 다녀가라는 부처님의 뜻이리라.

 

아침에 소수서원으로 갈때에 지나쳤던곳, 선비촌내에 소수서원이 있다.

소수서원은 중고등생때 역사교과서에서 배운기억이 있는데

수백년전에 이런 서원을 세우고 학문을 체계적으로 가르쳤다는게 대단하다.

 

소수서원은 ?

조선 중종 38년(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워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 된 이 서원은

수많은 명현거유 배출은 물론 학문탐구의 소중한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소수서원은 건립 당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불렸는데 그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조정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으로 사액되었습니다. 사액서원이라함은 나라로부터 책, 토지, 노비를 하사받아

면세, 면역의 특권을 가진 서원을 말합니다.
'소수(紹修)'라 함은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닦게 하였음'이란 뜻으로 학문 부흥에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 명종임금은 손수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이 서원은 풍기군수였던 신재(愼齋)주세붕(周世鵬 )선생이 고려말 유현(儒賢)인 회헌 안향(安珦 )선생의 연고지에다가

조선 중종 37년(1542) 사묘(祀廟)를 세우고 안향 선생을 주향(主享) 하였으며, 다음해에는 안향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학사(學舍)를 세워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을 본받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데서 비롯되었다.

중종 39년(1544)에는 안축(安軸)선생과 안보(安輔)선생을 배향하였으며, 명종원년(1545) 안향 선생의 후손 안현이

경상감사가 되어 서원의 사당을 참배하고 각종 경비를 지원하였다.

명종 3년(1549) 퇴계 이황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경상감사 심통원(沈通源)에게 서원의 편액과 토지·노비를

하사해 주도록 계청(啓請)하자, 감사 심통원이 조정에 계청함으로써 이듬해 명종5년(1550) 5월 왕명으로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이 서원의 이름을 『소수紹修』 라 지었으니,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하였음"

(기폐지학 소이수지旣廢之學 紹而修之)이란 뜻이다. 명종임금이 손수 『紹修書院』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 하였으니,

곧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공인된 사립고등교육기관(私立高等敎育機關)으로 인정 받게 되었다.

인조 11년(1633)에는 서원을 창건한 주세붕 선생을 추향(追享)하였다.

회헌 안향(1243∼1306)선생은 고려 원종 원년(1260) 진사과에 급제한 후 우사의(右司義)등을 거치면서 문교진흥에

진력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이며 문신이었다.

신재 주세붕(1495∼1554) 선생은 많은 저서를 남겼고 황해도 관찰사,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경내에는 강학당, 일신재·직방재, 학구재, 지락재, 서고, 문성공묘(文成公廟 )등이 있고,

회헌영정(국보 제111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보물 제458호)등 중요유물과 각종 전적(典籍)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경내에는 이곳이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이있었음을 알려주는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보물 제59호)

등의 불적(佛蹟)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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