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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고궁,사찰,기타)

경복궁 - 3 (08. 11. 02)

by 柔淡 2008. 11. 11.

이어서 강녕전과 교태전이다.

 

강녕전

사정전을 돌아 곧바로 뒤로 가면 향오문 이란 문이 나오고, 그 문을 들어서면 정면 11칸에 측면이 5칸 해서 55간이나 되는 상당히 큰 건물이

바로 강녕전이다. 동서 양쪽에 각각 동소침, 서소침과 함께 행각으로 둘어싸여 있다. 동소침의 이름이 연생전이고, 서소침의 이름이 경성전 이다.

흔히 이 공간을 침전영역으로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왕의 침소라는 축소된 의미보다는 '왕의 일상적인 생활 및 업무공간'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왕이 강녕전을 침소로 쓰기도 했지만, 대신들과 만나 일상업무를 보는 집무공간으로도 활용하거나 연회를 베풀기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왕실 가족들과 연회를 즐길 때는 강녕전 월대를 중심으로 임시 가설무대를 넓게 설치하여 이곳에서 궁중가무 등을 관람하기도 했다.

강녕전은 1359년(태조4)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 건립되었다. 그해 10월 정도전이 궁궐에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아울러 각 정각에도 이름을

지어 그 뜻을 태조에게 말하였는데
'일상적으로 거처하는 가운데 늘 덕을 쌓고 황극을 세우면 오복을 누리게 되는데, 오복의 가운데가 바로 강녕이고 이는 오복을 모두 차지하기를 기원'

하는 뜻이라고 한다.

강녕전의 외형적인 특징 중 하나는 강녕전의 지붕이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지붕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경복궁의 교태전, 창덕궁의 대조전,

창경궁의 통명전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용마루가 없는 전각들은 대부분 왕 또는 왕비의 침전으로 쓰였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강녕전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손에 서울이 폐허가 될 때 불타 없어졌다. 그 후 270년이 지난 고종 초년에 경북궁을 중건할 때 당연히 함께 중건되었다.

그러나 다시 세워진 강녕전은 50년을 넘기지 못하고 또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1917년 창덕궁 내전에 큰 불이 났는데 이름 복구할 때 경복궁에 남아있던

건물들을 옮겨다 놓으면서 강년전은 창덕궁의 연침인 희정당이 되어있고, 경복궁에는 1995년에 새로 복원된 강녕전이 들어서 있다.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응지당

 연길당

 

 

 

 흠경각

 

 

 

 교태전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寢殿)으로 중궁전(中宮殿), 곤전(坤殿)이라고도 한다. 궁궐에서도 가장 깊숙한 중심부에 위치해 구중궁궐이라 부른다.
왕비도 공식적인 업무가 많았는데 이를테면 내,외명부 총괄, 친잠례 등 주요업무와 왕의 공식적 수행업무를 보필하는 왕비의공식적 업무도

상당했다(혼례, 제사 등). 따라서 교태전은 왕비의공식 집무실도 겸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음(陰)과 양(陽)이 화합하고 교통하는 주역(周易)의 원리를 통해 설명되는 "태(泰)괘"를 빌려 왕조의 법통을 생산하고 이어주는
왕비의 역할을 사상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왕비는 국모로 대접을 받고 있었으나 유교적 관습으로 행동에는 많은 제약이 따랐다. 그래서 그에 대한 위로의 공간인지 작은
동산과 꽃계단이 아미산이라 하여 곱게 꾸며졌다. 조형예술을발휘한 굴뚝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왕비의 후원인 아미산의 아름다운 굴뚝과 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