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유산(고궁,사찰,기타)

불국사 4 - 다보탑과 석가탑 (08. 12. 27)

by 柔淡 2008. 12. 31.

다보탑과 석가탑은 오히려 불국사보다 더 유명하다.

 

다보탑

다보탑과 석가탑(불국사삼층석탑,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

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基壇)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았을 듯한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수리를 하기 위해 포장을 둘러쳤다.

 

 

 

 

 

 

 

석가탑

 

불국사삼층석탑과 불국사다보탑(국보 제20호)은 절의 대웅전 앞 뜰 동서쪽에 각각 세워져 있는데, 서쪽탑이 삼층석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

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

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제38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훌륭한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 있으며, 목조건축을 본따서 위·아래층 기단의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탑신에도 그러한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치켜올려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탑의 머리장식(상륜부)은 파손되어 1973년 남원 실상사삼층석탑(보물 제37호)의 머리장식을 본따서 복원하였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 모양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되며, 그 후 원래 모습대로 잘 보존되었으나, 안타깝게도 1966년 9월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다. 그해 12월 탑을 완전하게 복원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 제126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石工)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대웅전 

불국사 대웅전은 1765년(건륭 30)에 중창된 것이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봉안한 전각으로 대웅이란 말의 뜻은 인도의 옛말 마하비라를 한역한 것으로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을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 일컫는 데서 유래한다. 기단부 및 초석 등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남아 있다. 건물의 규모를 보면 정면

5칸, 측면 5칸인데 당당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건물 기단은 높지도 얕지도 않은 알맞은 높이로서 4.2척 정도이다. 건물의 전체 높이는 43척(13미터)이고

기단 4면에 계단을 설치하여 건물로 오르게 되어 있다. 동·서 양 측면 중앙으로는 동·서회랑에서 꺾여 들어온 익랑(翼廊)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건물의 구조는

다포식 팔작지붕 단층 불전으로 18세기 중엽의 전형적인 구조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중앙부에 수미단(須彌壇)의 불단이 있고 그 위에 목조의 석가 삼존불이 안치되었다. 삼존불은 중앙에 석가모니불이 있고 그 좌우에 미륵보살과

갈라보살이 협시하였고 다시 그 좌우에 흙으로 빚은 가섭(迦葉)과 아난(阿難)두 제자상이 모셔져 있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쪽이 약간 길지만 거의 정방형에 가깝고 불단이 뒤쪽으로 치우쳐 있어 내부 공간이 넓게 느껴진다. 내부에는 안두리 기둥을 둘렀는데

앞뒤쪽으로는 외두리 기둥 배열과 같게 기둥을 배치하고 측면 쪽은 기둥 1개를 생략한 이른바 감주법(減柱法)을 적용하여 공간을 넓게 하였다. 공포는 다포로

외3출, 내4출의 형식으로 외7포, 내9포작이며 살미 첨차는 초화무늬와 봉황머리 등을 조각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특히 평방에 돌출된 용머리가 인상적

으로 보인다. 가구(架構)는 2고주 7량가로 고주 위에 대량을 얹고 대량 위에는 동자주를 얹고 종량을 놓아 판대공(板臺工)이 종도리(宗道里)를 받도록 하였다.

고주와 평주사이는 퇴량과 격량으로 연결시켜 내진과 외진이 결합되도록 하였는데 그 구성이 견고하게 짜였다.
천장은 우물 천장인데 층단식으로 중앙 쪽으로 높였다. 외관에서 보면 정면의 중앙칸이 다른 건물에서는 보기 드문 넓은 주칸 크기로 되어 있다. 협간(夾間)과

툇간(退間)에 비해 거의 2배에 가까운 주칸이라 시원스럽고 확 트인 느낌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