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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고궁,사찰,기타)

불국사 1 (08. 12. 27)

by 柔淡 2008. 12. 31.

다음 에디터에 문제가 있는지 글을 쓸때는 이상이 없는데 나중에 보면 사진이 안보인다.

 

석굴암 관리실태를 보고 별로 기분이 안좋아서 내려오는길, 젊은 청년 한명이 불국사까지만 태워 달라고 한다.

광주에서 왔는데 공군사관학교에 합격하고 입학 할때까지 우리나라 국토를 돌아보는 여행을 하는중이란다.

너무 대견해서 이것저것 물어보니 간단한 옷과 몇푼의 여비만 챙겨왔는데 돌아다니다가 돈떨어지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여행경비를 조달 하려고 한단다.

36년전 고등학교 2학년때 보름동안 전국일주 무전여행을 했던 생각이 난다.

불국사 입구에서 그젊은이를 내려주고 입구를 찾았는데 나중에 보니 여기가 후문인것 같다.

 

<불국사 창건>

5천년 장구한 세월동안 발전해온 우리 민족문화의 정수로 천년세월 너머 현대의 무지한 중생들에게 불국토의 장엄함과 사모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불국사. 불국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는 서기 528년(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發願)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부처님(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부처님(阿彌陀佛)을 주조해 봉안했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였으며,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다른 기록인, 《불국사 사적(事蹟)》에는 이보다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祠)되었다 했다.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대성효 2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던 장대한 가람의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전각배치도

 

 안내도

 

 

 

 

 

 

범종각 

 

 

 범종각을 지나니 국사교과서에서 배웠던 안양문, 청운교, 백운교가 나타난다.

청운교. 백운교는 별도로 정리를 하려고 한다.

 이문으로 들어서니 다보탑을 수리중이다.

다보탑, 석가탑, 대웅전도 별도로 정리해야겠다.

 

 무설전

무설전은 강당에 해당하는 건물로 현재의 건물은 1973년 중창 불사 때에 세워진 건물이다. 이 건물이 세워지기 전의 발굴 조사에 의해 평면 규모와 기단 내용이

밝혀졌다. 신축된 건물은 그 근거에 의해 기단과 평면이 확정되었다. 원래의 무설전은 어떠한 건축 모양이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 건물에 대한 자료는

<불국사 고금창기>에서 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을 믿는다면 불국사 경내에서는 가장 먼저 지어진 건물로 볼 수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왕명에 의해 무설전을 새로 짓고 그곳에서 <화엄경>을 강의했다고 한다.

 

 

 

 

 관음전에 오르는 계단

 비로전 입구

 

 

 비로전

 

 

 

 관음전

관음전(觀音殿)은 무설전 후방 동쪽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원래는 751년에 창간되었으나 여러차례 중수를 거치다가 어느 때인지 없어진 것을 1973년에

새로 복원하였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거의 정방향의 건물이다. 내부에는 안두리 기둥이 4개 있고 다포식의 사모지붕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건물 역시 정면이나 측면의 어간이 양측 주칸에 비해 2배 가까이 되어 중앙칸을 특히 강조한 느낌이 들며 이로 인해 구조적으로는 어간에 무리가 간다고

생각되지만 정면이나 뒷면 어간에는 문선을 샛기둥과 같은 역할이 되도록 튼튼한 부재를 사용하여 이를 보완하고 있다. 공포는 내외 2출목의 5포작으로

외부 살미는 견실한 쇠서형을 조각하고 내부는 교두형으로 하였다. 가구 형식은 2고주 5량가로 하고 종량 위는 심주를 세워 절병통의 심주로 하고 이곳에

추녀 뿌리가 모이도록 하였다. 천장은 내진에 우물천장, 외진은 빗천장으로 하고 바닥면에는 전돌을 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