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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고궁,사찰,기타)

경주 문무대왕릉 일출 (08. 12. 27)

by 柔淡 2008. 12. 30.

경주 양남에 있는 회사 수련원인 숙소에서 하룻밤을 자고나니 상쾌한 기분인데, 수련원이 바닷가 언덕에 자리잡고 있어서

바람소리가 매섭고 바닷바람이 차다. 하늘을 보니 별이 초롱초롱한게 멋진일출이 기대되는데....

 

숙소에서 10KM정도 떨어진 문무대왕릉에 6시50분쯤 도착하니 벌써 많은 진사님들이 준비를 하고 있다.

일출은 07시 30분 전후, 바삐 장비를 챙겨서 데이지와 함께 백사장으로 내려섰다.

그러나 먼바다에는 짙은 구름이 두텁께 깔려있다.

 

문무대왕릉 소개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이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또한 병부, 창부 등 중앙관청을

창설하였고, 지방통치를 위한 5소경제도와 9서당 10정의 군사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국가 체제 완성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대왕암은 자연 바위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그 안은 동서남북으로 인공수로를 만들었다. 바닷물은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나가게 만들어 항상

잔잔하게 하였다. 수면 아래에는 길이 3.7m, 폭 2.06m의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한 거북모양의 돌이 덮혀 있는데 이 안에 문무왕의 유골이 매장

되어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이 죽으면서 불교식 장례에 따라 화장하고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아들 신문왕은 동해 근처에 감은사를 세워 법당아래 동해를 향한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수중릉<水中陵>으로 동해변<東海邊>에서 200m 떨어진 바닷속에 있다. 봉길리<奉吉里> 앞 바다

물속에 솟은 바위가 있어 이 바위를 대왕<大王> 바위라고 불러왔다. 대왕암<大王岩> 위에 올라보면 가운데에 비교적 넓은 공간이 있고, 그 동서남북

사방으로 수로<水路>를 내어 맑은 바닷물이 파도를 따라 동쪽으로 나 있는 수로<水路>로 들어오고 서쪽 수로<水路>로 나감으로써 큰 파도가 쳐도

안쪽 공간은 바다 수면이 항상 잔잔하게 유지되게 되어 있다. 대왕암 가운데 넓은 공간에는 넓적하고도 큰 돌이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는데, 길이 3.6m·

너비 2.85m·두께 0.9m의 거북 모양의 화강암석으로 수면<水面>은 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이 돌 밑에 어떤 특별한 장치를 해서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유골<遺骨>을 봉안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돌 밑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어떠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대왕암에서 중앙의 장골처<藏骨處>를 중심으로 사방에 수로<水路>를 설치한 것은 부처의 사리를 안치한 사리탑<舍利塔>의 형식과 비교되기도 한다.

즉 사방에 문이 마련되어 있는 인도탑<印度塔>의 경우나 백제의 미륵사탑<彌勒寺塔> 하부에 4방으로 통로를 마련한 것과 같은 불탑의 형식이 이

대왕암에 적용되어 사방에 수로를 마련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재위<在位> 661-681)은 본명이 김법인<金法敏>이고, 무열왕<武烈王>의 맏아들로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평정하고, 당<唐>나라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통일을 완수한 신라의 영주<英主>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81년 7월에 왕<王>이 돌아가니

시호<諡號>를 문무<文武>라 하고, 왕의 유언에 따라 고문<庫門> 밖에서 불식<佛式>으로 화장<火葬>하여 동해구<東海口> 대석상<大石上>에 장사

하였다고 전한다. 이는 왕이 죽어서도 동해<東海>의 용<龍>이 되어 왜구<倭寇>를 막겠다는 유지를 받든 것으로 신라 사람들은 왕<王>이 용<龍>이

되었다고 생각하였으며 그 대석<大石>을 대왕석<大王石>이라 하였다고 한다.


문무왕<文武王>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은 동해변<東海邊>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고 금당<金堂> 밑에 동해<東海>를 향하여 구멍을 뚫어

동해<東海>의 조수<潮水>가 금당 밑까지 들어오게 하였는데, 이는 동해<東海>의 용<龍>이 된 부왕<父王>이 조수<潮水>를 따라 금당까지 들어

온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대왕암이 바라다보이는 인근 해변에 이견대지<利見臺址>가 있는데 신문왕<神文王>이 이곳에서 대왕암<大王岩>을

망배<望拜>한 곳이다.

 

 

 

 

 

 

 

 

 

 

 

 

 

 

 

 

 

 

2006년에는 12월31일 밤 10시에 해맞이 열차를 타고 1월1일 새벽 경주에 도착해서 이곳으로 왔던 기억이난다.

그때는 너무추웠고 아침식사를 할수있는 식당도 마땅치 않았다. 그때는 여기서 일출을 보고 기림사 - 대릉원을 보고

서울로 갔었다.

 

수중릉 위로 갈매기가 날아줘야 하는데 엉뚱한곳에서만 날아다닌다.

 

 멀리 감포마을도 새벽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한시간정도를 머므르다 이견대로 향한다.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건물이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호국정신을 받들어 31대 왕인 신문왕이 681년에 세웠다.

신문왕은 해변가에 감은사라는 절을 짓고, 용이 된 아버지가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닐 수 있도록 법당 밑에 동해를 향하여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다.

그 뒤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이견대에서 신문왕이 용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평화롭게 할 수 있는 옥대와 만파식적

이라는 피리를 하나 받았다고도 한다. 이견대라는 이름은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크게 이익이 있었다는 뜻을 포함한 말인데,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란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발굴조사 때 건물이 있던 자리가 발견됨으로써 신라의 건축양식을 추정하여 오늘날 새롭게 다시 지었다.

 

 

 이견대에서 바라본 문무대왕릉

 봉길리 마을. 우리나라는 어디가나 전봇대와 전깃줄이 구도를 어렵게 한다.

 

이견대를떠니 석굴암과 불국사로 가는길 오른쪽에 감은사지가 있다.

 

사적 제31호. 〈삼국유사〉에 문무왕(文武王)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역사를 시작했으나 중도에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해 682년(신문왕 2)

완성했으며, 금당의 기단 아래에 동향한 구멍을 두어 이곳으로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이 들어와 서리도록 했고, 또 유서에 따라 골(骨)을 매장한 곳이 절의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大王岩)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절의 이름은 본래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에서 진국사(鎭國寺)였으나 신문왕이 부왕의 호국충정에 감사해

감은사(感恩寺)로 고쳐 불렀다. 1960년과 1979~80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이탑식가람(二塔式伽藍)배치로 남북보다 동서 회랑의 길이가 길며, 양 탑의

중앙부 뒷면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금당터가 확인되었다. 또한 금당의 바닥구조가 H자형의 받침석과 보를 돌다리처럼 만들고 그위에 직사각형의 석재유구

(石材遺構)를 동서방향으로 깔아 마치 우물마루 모양으로 된 것은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매우 흥미롭다. 원래 앞면 8칸, 옆면 4칸이었던

북쪽 강당은 후대에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고쳐 지은 것도 밝혀졌다.

 

 

 

 전에는 사진에서 보이는 이곳까지 바다였던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