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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장회나루- 퇴계와 두향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09. 06. 20)

by 柔淡 2009. 6. 25.

장회나루는 단양에서 충주방향으로 16km정도에 위치한 유람선 선착장이다.

전에는 신단양 선착장에서도 유람선을 탈수 있었는데 수심이 얕아진지 오래되어서 이제는 신단양에서 유람선을 타기는 어렵다.

그래서 사시사철 유람선을 탈수있는 장회나루가 각광을 받게 된것이다.

 

장회나루에는 청풍, 월악을 거쳐 충주까지 가는 유람선이 있고 옥순대교를 지나 다시 장회나루로 돌아오는 유람선이 있다.

우리는 당연히 다시 장회나루로 돌아오는 유람선을 탔다. 

 

 유람선은 단양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상류쪽으로 올라가다가 다시돌아 내려온다.

 충주로 가는 유람선 선착장

  

 우리가탄 유람선 선착장

 

 

 

 

 제비봉

 단양쪽 상류

 

 제비봉

 

 

 두향의묘

단성면 장회리에는 단양의 15대 군수였던 퇴계 이황 선생과 단양군의 한사람의 관기였던 두향에 대한 사랑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사실상 두향묘는

유명 무실하다가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무연분묘 이장과정에서 두향의 묘가 대두되었고 옛 사연을 따른 소설가 정비석 선생이 현지를 다녀가 명기열전을

신문에 실으면서 알려졌다.

 

단양의 관기였던 두향이 퇴계 이황 선생의 형이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함에 안동의 풍기군수로 전출가게 되였다. 두 사람은 서로가 학문이 높은 사람이라

사랑보다도 묵객으로 대했고 두 사람의 글벗은 서로가 수준이 같았기에 가능했다고 하고 두향은 거문고를 잘 탔고 난초를 잘 그렸다 한다. 이황 선생 역시

선정을 베풀었고 당대에 재능이나 학식을 중국에서도 따를 자가 없었다 하는 것은 현재의 국제 퇴계 학회의 발족을 가져왔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사랑과 생활의 애틋한 이별의 아쉬움은 대단했을 것이다. 두향은 기적에 빠져서 이황 선생과 함께 즐겨 찾아 풍유를 즐기던 강선대 아래 초막을 짓고

퇴계 이황 선생의 건강함과 앞길의 영광을 빌었다한다. 생시에는 퇴계 선생이 좋아하던 난을 키우고 난을 그리고 100명 이상이 앉아 놀 수 있는 강선대에서

난을 그리면서 거문고를 타면서 세월을 보내다 젊은 나이에 죽었다.

유언하기를 내가 죽거든 퇴계 이황 선생이 즐겨 찾던 강선대 아래 묻어달라고 유언하여 두향의 묘가 생기게 되였다. 이 강선대는 수몰되기 전에는 강에서

30m높이에 있었으나 수몰되어 20m 강물에 담겨있다. 가뭄에는 그 모습을 드러낸다. 강선대 암석에는 충청도 관찰사 윤헌주가 1717년에 "강선대" 라고

각자했고 당시의 석공은 진삼용이 새겼다고 했다.

체보자주: `95년에 제9회 두향제가 열렸다. 단성 향토문화회가 주관하고 동양일보사가 후원하였다. 두향제의 특징은 국악의 제례악으로 하고 있고 옛날

두향제가 있기 전 단양의 기생들이 오면은 술잔을 올렸다 한다. 현재의 두향묘는 이장했는데 `90 충주댐 수문 조작시 두향묘 상석까지 물이 올라왔다.

1회 ∼ 6회까지는 단양향토문화보존회에서 7회는 합동으로 8회부터는 단성향토문화연구회에서 추진했는데 매년 5월 초순에 두향제가 개최되는데 400여명 모인다.

 퇴계 선생과 기생 두향의 사랑 이야기 전설

이황(李滉) 퇴계(退溪)선생은 매화(梅花)를 끔직히도 사랑했다. 그래서 매화를 노래한 시가 1백수가 넘는다.
이렇게 놀랄만큼 큰 집념으로 매화를 사랑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단양군수 시절에 만났던 관기(官妓) 두향(杜香) 때문이었다.
퇴계선생이 단양군수로 부임한것은 48세 때였다.그리고 두향의 나이는 18세였다.

두향은 첫눈에 퇴계 선생에게 반했지만 처신이 풀 먹인 안동포처럼 빳빳했던 퇴계.
그러나 당시 부인과 아들을 잇달아 잃었던 퇴계선생은 그 빈 가슴에 한 떨기 설중매(雪中梅) 같았던 두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두향은 시(詩)와 서(書)와 가야금에 능했고 특히 매화를 좋아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깊은 사랑은 겨우 9개월 만에 끝나게 되었다. 퇴계선생이 경상도 풍기군수로 옮겨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두향으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변고였다. 짧은 인연 뒤에 찾아온 갑작스런 이별은 두향이에겐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다.

이별을 앞둔 마지막 날 밤, 밤은 깊었으나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퇴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일이면 떠난다.기약이 없으니 두려울 뿐이다."

두향이가 말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그리고는 시 한수를 썼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며
어느듯 술 다 하고 님 마져 가는 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이날 밤의 이별은 결국 너무나 긴 이별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1570년 퇴계선생이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1년 동안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퇴계 선생을 떠나보낸 뒤 두향은 간곡한 청으로 관기에서 빠져나와
퇴계선생과 자주 갔었던 남한강가에 움막을 치고 평생 선생을 그리며 살았다.

퇴계선생이 단양을 떠날 때 그의 짐 속엔 두향이가 준 수석 2개와 매화 화분 하나가 있었다.
이때부터 퇴계선생은 평생을 이 매화를 가까이 두고 사랑을 쏟았다. 퇴계선생은 두향을 보듯 매화를 애지중지했다.
선생이 나이가 들어 모습이 초췌해지자 매화에게 그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면서 매화 화분을 다른 방으로 옮기라고 했다.

퇴계선생은 그 뒤 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등을 역임했고, 말년엔 안동에 은거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 퇴계선생 마지막 한 마디는 이것이었다.
"매화에 물을 주어라."
선생의 그 말속에는 선생의 가슴에도 두향이가 가득했다는 증거였다.

"내 전생은 밝은 달이었지.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
前身應是明月幾生修到梅花
퇴계선생의 시 한 편이다.

퇴계선생의 부음을 들은 두향은 4일간을 걸어서 안동을 찾았다. 한 사람이 죽어서야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었다.
다시 단양으로 돌아온 두향은 결국 남한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두향의 사랑은 한 사람을 죽기까지 사랑한 절박하고 준엄한 사랑이었다.

그 때 두향이가 퇴계선생에게 주었던 매화는 그 대(代)를 잇고 이어, 지금 안동의 도산서원 입구에 그대로 피고 있다.

 

 

 

 충주댐 만수위 표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