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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국보 198호 단양 신라적성비 (09. 06. 20)

by 柔淡 2009. 6. 26.

저녁무렵이 되니 비가 그친다.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신라적성비로 향한다. 중앙고속도로를 지나면서 몇번이나 상행선 단양휴게소에서 휴식했는데 휴게소 뒤쪽에 국보198호인

이비가 있는지 전혀 몰랐었다. 휴게소 주차장에서 우측을 보면 적성비로 올라가는 조그만 안내판이 있고 10분정도 올라가면 적성산성에 이 비가 있다.

 

신라적성비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비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 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1

978년에 30㎝ 정도가 땅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는데, 비면이 깨끗하고 글자가 뚜렷하다.

비(碑)는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가 좁고 얇다.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고, 자연석을 이용한 듯 모양이 자유롭다.

전체의 글자수는 440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지금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로 거의 판독할 수 있다.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으며,

예서(隸書)에서 해서(楷書)로 옮겨가는 과정의 율동적인 필법을 보여주고 있어 서예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비문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신라의 형벌 및 행정에 대한 법규인 율령제도 발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노역체제, 재산 분배에 관한 국법이 진흥왕

초반에 마련된 것과 적성 지방에 국한된 관습을 법으로 일반화하고 있는 사실 등이 그러하다.

 

비문 첫머리에 언급된 10인의 고관의 관등과『삼국사기』의 내용을 견주어 살펴볼 때, 비의 건립은 진흥왕 6∼11년(545∼550)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북방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지역에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과 함께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비록 순수비(巡狩碑: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척경비(拓境碑: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우연’ 이라는 말이 적합한 유물이다. 단국대 박물관 조사단의 겨울 답사 도중 흙이 잔뜩 묻은 등산화의 흙을 닦아 내려고 올려 놓은 바위가 바로 적성비 였단다.

 

보석의 원석을 발견한 듯한 기쁨은 그 날 저녁 술집에서 먹은 술병이 자그마치 108병이었는 데 그 병들을 테이블에 올려 놓고 기쁨을 표현하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적성산성

 

 중앙고속도로

 

 단양휴게소 (서울방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