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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부산·울산·대구·경상

신석기부터의 역사와 성현의 발자취가 어려있는 반구대 (09. 07. 12)

by 柔淡 2009. 7. 21.

태화강과 선바위를 지나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로 찾아간곳은 반구대 암각화다.

반구대와 암각화를 따로 나누어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반구대와 암각화가 그려진 바위로 가는길이 너무 아름다워 별도로 소개를 하려한다.

 

반구대

산세와 계곡,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절경으로 마치 거북 한마리가 넙죽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어 반구대 라고 하며, 선사시대 유적인 국보 제285호 반구대 암각화가 있어 오랜 역사와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합니다.

[유래]
언양읍 대곡리에는 경승지인 반구대가 있는데 연고산의 한 자락이 뻗어내려와 이곳에 와서 우뚝 멎으면서 기암괴석으로 절정을 이루고 있으며, 마치 거북이 넙죽

엎드린 형상이므로 반구대(盤龜臺)라 한다.
두동면 천전계곡(川前溪谷)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옥류가 이 곳에 모여 호반을 형성하니 절승가경(絶勝佳景)으로 이름이 높다.

그래서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찾아 시를읊고와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신라 때는 화랑들이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다니면서 고귀한 기상을 기르고 심신을 단련하던 때에, 이 곳에 와서 훈련하고 야영생활을 했으며, 또 고려말의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조선초기의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한강 정구(寒岡 鄭逑) 등 삼현이 이곳에서 명시를 남기고 향민들을 교화 하였다.

그래서 반구대 아래의 소구(小丘)인 포은대(圃隱臺)에는 이 삼현의 행적을 기록한 반고서원 유허비와 포은대영모비가 세워져 있고 또 맞은편에는 중창한 반구서원

이 있다.

이서원은 숙종 38년(1712년) 세 성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이들의 위패를모셨다. 영조 4년(1728)화재로 소실이 되어 다음해 다시 복원

되었으나 고종 8년(1728)에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이 되었다.

그런데 울산공업단지가 설정된 후인 1960년대 중반 공업용수를 위하여 범서읍(凡西邑)사연(泗淵)에다 반구천(盤龜川)의 하류를 막아 사연댐을 축조하자 집수

(集水)로 수위가 높아져서 귀중한 암면각화가 수중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우리고장에 이같이 유서깊고 귀중한 고고학적 자료가 있다는 것은 자랑할만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 중 하나는 현재 대곡리 산 234-1번지 수중(水中)에 있으며 국보제285호로 지정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상류의 천변(두동면 천전리)에 있는데 국보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다.

 

반구대 암각화 전시관, 대형버스는 여기가지만 갈수있다. 여기서부터 암각화 있느곳 까지는 1.2km 

 가는길엔 아름다은 실개천이 흐른다.

 

 반구대

 바위에는 반구라는 글씨가 음각되어있다.

 

반구서원, 예선비들도 원추리나 접시꽃을 심어놓고 즐겻나 보다.

 

 

  

 

 

 

 반구대 위에 작은 정자가 있다.

 소형차는 이 간판이 서있는곳가지 올수있다.

 

 

 

 

대곡리 마을에는 자연늪지가 있다.

 

 

자연늪지위에는 이렇게 멋진 나무다리가 놓여있고 여기서부터 600m 정도 걸으면 암각화가 그려진 바위가 나온다. 

가는 도중에는 공룡발자국 화석도 있다. 

 

 

 가는길엔 이렇게 예븐 원추리와 자귀나무가 미모를 뽐내고 있다.

 

 

 드디어 암각화가 그려진 바위에 도착했지만 물이 많아 가까이서 볼수가 없다.

 

 

 

 평상시 물이 빠지면 실제 바위에 새겨진 그림을 볼수있다.

 대신 입간판에 사진으로된 그림으로 본다.

 

 암각화란 선사 시대의 사람들이 생활 주변에서 일어난 갖가지 일들을 주제로 삼아 그것을 바위에 새겨서 그린 그림이다. 주로 커다란 바위 등 집단의 성스러운 장소에 그렸는데, 사람들은 그곳에 모여서 각종 의례를 거행하였다고 추측된다.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태화강의 한 지류인 대곡천의 소위 "건너 각단"이라고 부르는 곳에 그려져 있으며, 그림이 집중된 곳의 바위면의 크기는 너비 10m 높이 3m이다. 그러나 그 좌우에서도 적지 않은 형상들이 확인되고 있어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는 모두 10여개에 이른다.

 

이 암각화는 신석기 시대부터 여러 시기에 걸쳐서 제작되었으리

라 여겨지며 시대별 양식의 차이를 살필 수 있는데, 표현 대상의 내부를 모두 쪼아낸 면쪼기(面刻, 모두쪼기) 기법과 윤곽만을 쪼아낸 선쪼기(線刻) 기법으로 나눌 수 있다.

새겨진 물상은 크게 바다동물과 육지동물, 사람, 도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바다동물로는 고래, 물개, 거북 등이, 육지동물로는 사슴, 호랑이, 멧돼지, 개 등이

많이 보인다. 사람은 얼굴만 그려진 경우와 바로 선 모습, 옆으로 선 모습, 배에 탄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도구로는 배, 울타리, 그물, 작살, 노(弩)와 비슷한

물건 등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선사인들의 사냥 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사 냥감이 풍성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바위에 새긴 것으로 여겨지는데, 동물과 사냥 장면을

생명력있게 표현하고 사물의 특징을 실감나게 묘사한, 사냥미술인 동시에 종교미술로, 선사 시대 사람의 생활과 풍습을 살필 수 있는 최고 걸작품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