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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광주·전라

천년을 이어온 고찰 - 강진 무위사 1 (09. 08. 15)

by 柔淡 2009. 8. 17.

10여년전, 전라도 장성에서 3년정도 산적이 있다.

그때도 주말마다 남도의 여기저기를 돌아다였는데 이상하게도 강진에는 한번도 가지 못했다. 

이번 여름휴가를 강진으로 갈까 생각했다가 마침 강진과 완도 팸투어 계획이 있길래 조금 바쁜시기이지만 만사를 제쳐놓고 신청을 했다.

녹색의 땅 전남, 그중에서도 남도답사 일번지인 강진과 완도를 다녀온 이번 여행의 결론부터 말하면 대만족이다.

 

제일먼저 들른곳은 천년을 넘게 이어온 고찰 무위사다.

 

무위사 소개 :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무위사 홈페이지 발췌)

 

<무위사사적>을 보면 절은 삼국 통일후 875년(헌강왕 1)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갈옥사(葛屋寺)로 창건한 것이 첫번째 중창이라 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905년(효공왕 9) 이후 선종인 가지산문(迦智山門)계통의 선각국사(先覺國師) 형미(逈微, 864∼917)가 고려 태조 왕건의 요청으로 무위갑사(無爲岬寺)

에 머무르면서 절을 중수하고 널리 교화를 펴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한다. 따라서 무위사는 형미 스님이 주석했던 10세기 초 이전에 무위갑사라는 절로 창건되었음

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무위사사적>에 의하면 고려시대인 946년(정종 1)에 형미가 제3창을 하면서 모옥사(茅屋寺)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946년은 이미 형미가

입적한 30년 뒤에 최언위가 지은 <고려국고무위갑사선각대사편광영탑비>가 세워진 해라서 믿기 어렵다. 이것은 아마 형미가 모옥(茅屋)이던 무위갑사를 왕건의

후원을 받아 크게 중창하면서 교화를 펼쳤던 사실을 후세 사람들이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무위사는 10세기 초 이전에 창건되었고, 형미에 의해 중창되었으며 가지산문 소속의 선종 사찰이었음은 분명하다.절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여러 가지 활동

기록이 보여지는 등 자못 활기를 띠고 있어 주목된다. 나라에서는 1407년(태종 7) 12월에 각처의 명찰로 여러고을의 자복사(資福寺)를 삼게 하였는데, 이 때 무위사

는 천태종 17사 중의 하나로 소속되었다. 이것은 무위사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선종 사찰에서 천태종 사찰로 그 성격이 변동되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으로 이해

된다. 이같은 사격의 변동은 고려후기의 천태종 백련결사의 활발한 활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만덕산 중심의 백련결사(白蓮結社)

도 천태종의 법화신앙에 입각한 결사운동으로 무위사의 사찰 성격 변동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믿어진다.

결국 무위사는 천태종 백련결사가 활발했던 고려후기에 이미 천태종 소속의 사찰이 되었다가 조선 초기 사찰통폐합의 2차정리기인 1407년에 천태종 소속의 자복사

로 남게 된 듯하다. 이 무렵의 연혁을 보면 1430년(세종 12)에 극락보전이 건립되었는데 지금 극락보전 안에 모셔진 목조 아미타삼존불도 이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1476년(성종 7)에는 극락보전 후불벽이 만들어졌고 후불벽화가 조성되었음이 <무위사극락보전묵서명(無爲寺極樂殿墨書銘)>으로 확인된다. 이 묵서명을 보면 극락

보전 건립에 관직을 부여받은 승려들이 참여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는 곧 극락전 건립이 조선 초기에 국가로부터 인정받았던 고급 기술자의 손으로 만들어진 건물

임과 함께 국가적인 사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7 <강진현 불우조>에는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했던 무위사를 이제 중수하고

 이로 인해 수륙사(水陸社)로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위사가 수륙사로 지정된 것과 극락보전의 건립, 아미타삼존도 · 아미타여래도등의 벽화 조성은 그 조성 시기 및 신앙 배경 등에 있어서 상호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왜냐하면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는 수륙재(水陸齎)를 빈번하게 행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수륙재는 지상에 떠도는 망령을 부처님에

의하여 환생케 하는 재생 의식으로서 적을 포함한 전사자를 위로하는 불교 의식이다. 죽은 영혼을 달래려는 수륙재는 곧 살아 있는 자들의 애도와 복수심까지 포용

하려는 차원에서 거행된 불교 의식인 것이다.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에 극락보전이 건립되고 아미타불의 벽화가 조성되는 것은 이와 같은 신앙 구조 속에서 가능

한 것이라 여겨진다.


한편 <무위사사적>에 따르면 1555년 (명종10년)에 태감(太甘) 스님이 4창하고 무위사로 개칭했다 한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무위사란 절 이름이 이보다 훨씬 앞선

시기인 1407(태종 7)에 이미 나타나고 있어 <무위사사적>의 이 부분 역시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임잰왜란 · 병자호란 두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절은 그다지

피해를 입지 않아 절의 웅장하고 화려함이 일도(一道)에 으뜸이었다 한다.

 

그러나 그 이후 점차 법당과 요사가 훼손되어져 몇 개의 전각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1678년(숙종 4)에는 극락보전 앞마당에 있는 괘불석주가 제작되었다. 1739년

(영조 15)에 해초(海超) 스님의 공덕으로 전각이 보수되었는데 당시 미타전· 천불전 · 시왕전이 있었다. 당시의 주지는 극잠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절은 조선

총독부에 의해 극락보전이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었다.
해방 이후 1956년에 극락보전을 수리 보수하고 1975년 벽화보존각을 세워 그 안에 벽화를 봉안했다. 1975년에는 편광영탑비와 사리탑 등에 대한 정화 불사에 이어

봉향각 · 해탈문 · 명부전 · 천불전을 다시 짓고 1991년에 산신각을 1995년에는 이미 있던 동쪽 요사를 늘려 지었다.

 

 

제일먼저 만나는 해탈문. 해탈문에서 일직선으로 극락보전의 불상들이 보인다. 

 

 배롱나무가 화룡점정이다.

 

 일주문과 그듸로 보이는 산그리메가 환상이다.

 해탈문을 통과하면 3단의 계단을 거쳐 극락보전에 이르는데 그선이 일직선을 이룬다. 

 

 

 

극락보전 앞쪽 마당주변으로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위용을 자랑한다.

 

 극락보전과 3층석탑

 무위사는 월출산 자락에 기대어 아늑한 느낌을 준다.

여러 사찰을 다녀봤지만 뭔가 마음에 남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팽나무와 느티나무 사이로 보이는 극락보전

 담장과 추녀의 기와선이 간결하다.

 멀리보이는 산그리메, 무슨이름의 산인지는 모르지만  너무 멋지다.

 

 

 

 

 해탈문부터 극락보전까지 일직선으로 보인다.

 

 

 

 옥에티. 전에는 없었다는 일주문이 생뚱맞게 주차장 앞쪽에 서있다.. 

또한, 절의 얼굴인 해탈문앞의 불교용품 판매점과 주차장의 위치가 뭔가 안어울린다

 그런 한두가지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무위사는 뭔가 독특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사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