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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광주·전라

천년고찰, 국보 13호 무위사 극락보전 (09. 08. 15)

by 柔淡 2009. 8. 17.

무위사에는 국보도 있고 독특한 탱화도 있다.

 

무위사 극락보전

무위사는 월출산의 남쪽 기슭 성전면 월하리에 자리 잡은 고찰로 근처에 있는 월남사지와 함께 유서가 깊은 선종사찰이다. <무위사사적>에 따르면 무위사의 초창은

수양제 대업(隋煬帝 大業) 13년, 즉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가 관음사로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 승려 원효가 남의 나라인 백제 땅에 사찰을 창건했다는 것은 당시 양국간의 관계를 미루어 볼 때 도저히 믿어지기 어렵다. 무위사는 신라 효공광 9년(905) 이후 가지산문계통의 선승(禪僧) 선각대사 형미(逈微)가 주석

(住錫)하고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서 동리산문 계통의 도선국사가 875년에 2창했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무위사는 형미가 주석했던 10세기

초 이전에 창건되어 있었고 당시의 사찰명이 무위갑사(無爲岬寺)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국보 제13호로 지정된 무위사 극락전은 1956년에 해체보수하고 1974년에 벽화를 이전하고 다시 1983년에 해체·수리하였는데 이때 종도리 받침 장혀에서 선덕 5년

이라는 묵서명(墨書銘)이 나와 이 건물이 1430년(세종 12)에 지어졌음이 밝혀졌다.

 

극락보전 혹은 극락전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교주이시며, 중생들의 왕생극락을 인도하시는 아미타부처님을 주불로 하는 법당으로써, 미타삼부경에서 유래한 것

으로 정토신앙 계통의 종파나 화엄종 등 사찰의 주불전이 될 때는 무량수전(無量壽殿), 수광전이라고도 하며, 주불전이 아닌 경우에는 미타전 또는 아미타전(阿彌

陀殿)이라 한다.


무위사 극락보전은 다듬돌과 거친돌을 바른 층으로 쌓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배흘림을 한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3출목의 공포를 포작하고 대들보

를 얹었으며, 양쪽에 파련대공을 놓아 중종보를 받치고 있다. 가구구조는 이중량 구조로 되었으나 건물측면을 보면 이중량으로 보이지 않고 두 고주 위에 중종보만

이 올려져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공포는 주심포 형식이다. 기둥은 간살이가 넓어 호남지방 특유의 오래된 수법을 지니고 있다. 측면은 건물의 구조가

그대로 노출되어 벽체의 면과 가구의 선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는 맞배지붕으로 된 주심포계 건물의 특징으로 수덕사 대웅전, 봉정사 극락전의 측면

에서도 이와 비슷한 아름다운 구조미를 볼 수 있다.

이 건물의 구조형식은 수덕사 대웅전에 비유할 만큼 아름답게 장식되어 비록 헛첨차와 우미량은 없지만 두공 위에서 짜여진 살미와 첨차 그리고 그 내부의 보를

받는 보아지, 또 마루대공의 파련화와 인자대공의 조식이 빼어나다.
건물 내부에는 기둥이 전혀 없는 널찍한 공간을 이루었고 건물 내에 고주가 없어 후불벽을 세우기 위하여 양측에 각재를 올려 세워 그 사이에 벽을 발라 벽화를

그렸다. 벽 앞에는 불단을 놓고 반자를 짜 감실 보개천장을 만들었다. 불단 위쪽에는 닫집모양의 보개를 올리고 단 위에는 아미타 삼존불을 모셨는데 가운데

본존불의 눈은 활안(活眼)으로서 정면에서 보나 측면에서 보나 보는 이의 눈을 따라다닌다고 한다. 1956년 수리 시에 발견한 후불벽화는 이 건물의 창건보다

46년이 뒤진 것을 알 수 있다.

불단후면의 탱화는 회화사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작품이며, 국보급의 비천상 등의 벽화는 수리 시에 해체하여 별도로 보관하고 있다. 건물내벽에는 조선초기의

귀중한 벽화가 가득 차 있었는데 지금은 보존 각을 따로 건축하여 이곳으로 이전·보존하고 있다.


본 건물은 조선시대 초기에 세워진 주심포건축 중에서 가장 발전된 구조형식을 지니고 있어 하나의 건축양식이 정착되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건축양식

사적인 분류로는 주심포 중기건축에 속하나 조선중기부터는 다포계 건축이 주류를 이루어서 실제적으로는 주심포계의 전형적인 규범을 보여주는 완성기의 건물로

볼 수 있다.

 

극락보전 

 

 

 

 

후불벽화(後佛壁畵)로 그려진 아미타삼존도. 흙벽에 채색. 210 × 270 cm. 1476년 작. 후불벽화로 그리기 위하여 따로 세워진 벽면에 그려졌다.

구도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앞의 좌우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배치하고 뒤쪽으로 6명의 나한(羅漢)을 배치하여 원근감을 표현하였으나 상하로 구분하는

2단구조의 고려 불화나 16세기의 조선 불화와도 다른 것이다.


아미타불의 뒤에 표시된 광배(光背)의 모양은 키를 연상케 하는 것으로 15세기부터 사용되었다. 착의법(着衣法)은 고려 후기의 단아양식(端雅樣式)을 계승한 것이며, 가슴 아래까지 올라온 군의(裙衣)의 상단을 주름잡아 고정시킨 매듭끈을 대좌(臺座) 좌우로 길게 드리운 것은 조선 초기의 특징이다. 내용상에서도 변화가 있다.

곧 고려시대의 삼존형식에 자주 등장하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대신 지장보살이 배치된 것은 고려 후기의 신앙대상의 변화를 말해주고 있다. 화기(畵記)에

의하면 아산현감을 지낸 강노지(姜老至) 등 수십명의 시주로 혜련(海連) 대선사 등이 그렸다 한다.

 

불벽(後佛壁) 뒷면에 그려진 수월관음벽화. 아미타삼존 후불벽화와 같은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두광(頭光)과 신광(神光)을 지고 선 수월관음이 관음보살을

예배하는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내려다보고 있다.
머리에는 아미타불이 묘사된 보관(寶冠)을 썼으며, 왼손에는 정병(淨甁)을 들고 오른손에는 버들가지를 잡고 있다. 얼굴은 넓으며, 목은 굵고, 넓은 어깨가 강건함을 느끼게 한다. 주위에 물결을 묘사하여 바다 위에 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였으며, 천의(天衣) 자락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이러한 모습이 화면 전체에 표현된 파도의 곡선과 더불어 긴장감과 생동감을 불러일으킨다.


보통 선재동자의 모습은 작은 동자의 모습이지만 여기에서는 승복을 입은 노비구(老比丘)의 모습이다. 무릎을 꿇고 합장하는 자세에서 구도자의 모습, 간구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후불벽화에 관한전설은 극락보전 건립 후 어느 날 노승 한사람이 사찰을 찾아와 벽화를 그리겠다며 100일동안 법당분을 열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99일째 되던 날 궁금증이 많은 한 승려가 창살을 통해 법당안을 들여다보자 한 마리의 새가 입에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날아가 버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존 후불벽화 중 가장 오래된 무위사 후불벽화는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그려지지 못한 미완성의 그림으로 남아있다.

 

 

 

 

 

 

 

 

 3층석탑

 

 

 

 

 

 요사채와 범종각

 

 성보박물관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

 

 천불전

 산신각

 

 

 나한전

 명부전

 

 

안쪽에서 본 해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