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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광주·전라

실학의 근거지 - 다산초당 (09. 08. 15)

by 柔淡 2009. 8. 18.

월출산아래 월남사지를 출발해 20여분 차를 타고 달려간곳은 강진 하면 떠오르는 다산초당이다.

나주 정가인 내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곳이기도 하다.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다산의 생가와 전시관에는 몇번 갔었지만 여긴는 처음이다.

 

다산초당 소개 : 관광공사 자료 발췌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조선시대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다산(茶山)이라는

호는 강진 귤동 뒷산 이름으로 이 기슭에 머물고 계시면서 자신의 호로 써 왔다.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선생이 1801년 강진에 유배되어 18년여 동안 적거

생활하시는 동안『목민심서』『경세유표』등 500여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조선시대 성리학의 공리 공론적이며 관념론적인 학풍을 실용적인 과학사상으로

이끌고자 하는 실사구시의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다산초당은 노후로 붕괴되었던 것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1957년 복원하였고 그후 다산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숙처였던 서암을 복원하였다. 다산

초당에는 이밖에도 다산선생의 체취가 남아있는 다산4경이 있다. 다산선생이 직접 병풍바위에 「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 직접 수맥을 찾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 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등 다산사경과 흑산도로 귀양간 둘째형 약전을 그리며 고향이 그리

울때 심회를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다산은 1818년 57세로 강진에서 유배가 풀려나 고향 마재로 돌아가 1836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다산의 독백서를 보면 고향에 가서도 다산에서의 추억

을 잊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다산초당, 휴가철이라 관광객이 아주 많다. 

 

 유물전시관에서 초당으로가는길. 1km정도 되는데 20분정도 걸린다.

 

 

 가는길에 이런 민박과 식당도 보이고

 

 활엽수가 많아 습기가 가득차 있다.

 

 

 다산초당 사경중 하나인 연지석가산

 다산이 머물렀던 동암

 

 

 

 

 

 

 

 백련사 까지는 20여분 걸린다는데 시간이 없어 못가봤다. 내년 이른봄 동백을 보러 꼭 와보고 싶다.

 다산이 흑산도로 귀양간 형님 정약전을 그리워하며 내려다 보던 강진만 

 

  

 

 약천

 

 정석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다산과 매우 관계가 깊고 차를 함께 나누었던 초의선사와 다산에 관한 기록이다. (남양주 운길산 수종사 삼정헌 관련자료 2005년 10월 16일 수종사)

 

 

다른 절집과는 다르게 수종사에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곳이 삼정헌(三鼎軒)이란 다실이 있다. 전망대 바로옆에 소박하게 지어진 건물인데 큰유리로

통창을 내어 그안에서도 두물머리 일대가 잘 보인다.

삼정헌이 인상깊은 이유는 방문객들에게 무료로 좋은차를 제공하는데 차에대해 잘모르는 나같은 문외한도 그윽한 차맛을 느낄수 있다는것이다.

수종사의 물맛 때문인지 차가 좋아서 인지는 알수 없으나  무어라 표현할수 없는 깊은맛이다. 그런데 차를 마시면서 내려다 보는 두물머리 풍광이 차맛을 더해

주는것은 틀림이 없는것 같다.

 

수종사의 차맛에 관한 역사는 수종사 인근 조안면 마현리에 살던 다산 정약용이 수종사의 물을 길어다 차를 끓여 마셨다는 것과 우리나라 차의 중흥조라고 일컷는

초의선사가 한양에 오면 일부러 수종사에 머물며 다산과 교류했다는 사실로 볼때 옛날부터 대단했던것 같다.

 

서울신문에 연재되었던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차이야기에 나오는 내용을 발췌하였다.   

 

초의스님과 다산은 많은 교류를 했다.1812년 가을 초의선사와 정약용은 월출산 백운동에서 월출산 외경을 그렸다. 초의스님은 백운도(白雲圖)를 그렸고, 다산은

청산도(靑山圖)를 그렸다. 그리고 그 그림의 말미에 시를 지어 붙였다.1823년 대둔사지 편찬에도 함께 참여했다. 초의스님은 수룡스님과 함께 편집을 담당했고,

호의와 기어스님이 교정을 보았고, 완호와 아암스님이 감정했으며 정약용이 필사를 했다. 정약용이 해배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교류는 지속되었다.

초의스님은 한양을 방문할 때면 늘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수종사에 머물렀다. 수종사 인근 마현마을에는 그의 평생 스승 정약용과 정학연이 살고 있었다.

스승과 제자관계 떠나 수행자로

다산과 그의 아들은 수종사의 샘물로 늘 차를 달여마셨다. 한양에 온 초의스님은 수종사에 머물며 다산과 교류했던 것이다. 이렇듯 다산은 평생 초의스님의 스승

노릇을 하며 그의 안목을 더욱 깊고 넓게 해주었다. 다산 정약용은 차인으로 차를 직접 제다했을 뿐만 아니라 주민들에게 제다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18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강진을 떠날 때 제자들에게 차를 만들어 마시며 신의를 지켜나가도록 ‘다신계’(茶信契)를 만들었을 정도였다.

초의스님과 다산은 스승과 제자로서 유학을 배운 것만이 아니었다. 사상적으로 유·불·선에 대한 폭넓은 교류를 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차에 대한 제배 및 제다 그리고

행다 등 다양한 논의도 함께 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자신을 스승으로 모신 초의스님에 대해 다산은 스승과 제자관계를 떠나 한 사람의 존귀한 수행자로 평생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다산의 제일 아래제자. 윤종진의 묘소 

 

 

 

 

 

 

 

 다산의 생가인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의 다산유적지를 보시려면 링크를 눌러 보세요.

소화묘원과 다산 유적지 (http://v.daum.net/link/232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