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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강원

6. 25의 아픈 흔적, 파로호 전망대 (09. 12. 05)

by 柔淡 2009. 12. 10.

꺼먹다리와 딴산 일대를 둘러본후 파로호로 가는길, 바람과 눈발은 더욱 거세지고 화천이 북쪽임을

실감케한다. 파로호 선착장 조금 못미쳐 파로호 전망대와 안보전시관이 있다.

 

파로호 전적비 

 

 전망대에 오르는 길

 

 

 여기서 잠깐 파로호 전투에 대해서 알아보자

파로호 전투는 1951년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라는 큰 고난을 겪은후 피아간에 밀고 밀리는 공방을 거듭하던 1951년 5월하순에

있었던 전투다.. 미 9군단은 가평 - 춘천을 연하는 선(토페카 선)이 점령되자 이어서 서측에서부터 미 2사단, 국군 2사단, 국군 6사단,

미 7사단으로 전투편성하여 공격작전을 개시 하였다.

특히나 이 전투에서 국군 6사단은 용문산전투의 대승으로 사기가 충천하였다. 국군 6사단은 북한강의 서측에서 춘천 북방의 화악산

남측자락인 지암리를 목표로 하여 공격을 해 나갔다. 이때 중공군은 무질서하게 철수하면서 춘천 - 화천을 잇는 도로와 계곡으로 몰려

들었고 유엔군의 공군은 쉴새없이 이들에게 폭탄을 퍼부었다.

이무렵 미24사단의 21연대, 미7사단의 17연대, 국군 6사단의 19연대는 화천-춘천, 가평 - 지암리 축선을 완전히 장악하므로서 남쪽의

아군 진출선과 함께 삼각형의 포위망을 형성하였고 이 포위망속에는 대규모의 중공군이 필사의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섬멸되었다.

 

마지막까지 소탕작전을 벌인 6사단 5연대는 5월28일 하루동안 중공군 포로 38,000여명을 획득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당시 사단장 장도영

장군은 "후퇴하는 중공군을 추격하여 길가에 늘어진 중공군을 쓰레기 줍듯이 트럭에 실어 담았으며 아군소대 병력이 적 대대병력을 무더기

로 생포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라고 회상하였다.

 

그러나 이작전에서 화천점령이 지체되어 중공군을 완전히 포위하여 섬멸하고저 하는 계획은 차질을 빚었다. 만약이 전투에서 화천을 조기에

점령하고 파로호 이남에서 중공군을 완전 섬멸하였더라면 이후 휴전협상과 중공의 존립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전투에서 중공군 62,000명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는 전화를 올렸으며 아군도 341명의 전사자, 부상 2011명. 실종 195명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이상과 같은 戰果로써 6사단은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부대 표창을 받았으며 중공군 포로를 많이 잡았다고 해서 구만리 저수지를

「破虜湖(파로호)」라고 명명하였고, 구만리 언덕 화천 발전소 뒷산에 李承晩 대통령이 친필로 쓴 전승비를 세우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장열히 산화한 무명용사와 전장병들의 명복을 빕니다.

 

 전망대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파로호. 붕어조형물이 보인다.

 

 

 

 

 

 

 

 조그마한 공원에 서로다른 네개의 기념비가 있다.

 파로호에서 평화의 댐까지 운행하는 물빛누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