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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강원

실경 산수화가 실제경치가 일치하는 화천곡운구곡 (09. 12. 06)

by 柔淡 2009. 12. 15.

화천읍의 실내 얼음조각공원인 아시아 빙등광장에서 나와 사내면에 있는 곡운구곡으로 간다.

 

곡운구곡도 (화천문화원 발췌)


傍 花 溪 (제 1곡) 靑 玉 峽 (제 2곡) 神 女 峽 (제 3 곡)
白 雲 潭 (제 4곡) 鳴 玉 瀨 (제 5곡) 臥 龍 潭 (제 6곡)
明 月 溪 (제 7곡)

隆 義 淵 (제 8곡)

疊 石 台 (제 9곡)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는 지금의 강원도 화천 용담리 일대에서 30년 가까이 은둔 생활을 한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1635~1705)

선생이 빼어난 경치에 이름을 붙인 뒤 당대의 화가 조세걸(曺世杰)에게 그리게한 작품으로 이 작품은 조선시대의 실경산수화가 실제
경치와 유일하게 일치하는 작품
으로 문화적 가치가 매우 큰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한국의 자연경관 문화에는 3경(景), 8景(詠), 9景(曲), 10景(詠), 12景(詠)이 있는데 8경은 약 98처, 9곡은 6처가 파악되고 있습니다.
9곡은 강원도 화천의 곡운구곡(谷雲九曲), 강원도 삼척의 무릉구곡(武陵九曲), 충청도 괴산의 화양구곡(華陽九曲), 선유구곡(仙遊九曲),

고산구곡(孤山九曲), 황해도 해주의 고산구곡(高山九曲)등 6개처가 밝혀지고 있습니다.

 

구곡(九曲)의 연원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1130~1200)의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朱熹는 처음 건영부

(建寧府) 숭안현(崇安縣) 오부리(五夫里)에 살았고 41세에 건양(建陽)땅 노봉(蘆峰)아래 운곡(雲谷)에다 회암(晦庵)을 짓고 숭안에서

80리를 왕래 하였습니다. 1183년 그가 54세때 오부리(五夫里) 무이산하(武夷山下) 30리 되는 곳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만들었는데

여기서 이듬해 1184년 7언절구의 무이도가(武夷櫂歌)를 지었습니다. 주자는 무이정사잡영서(武夷精舍雜詠序)에서 이곳의 산세, 정사의

위치, 근처의 승경, 인간에 끼치는 자연의 영향, 동호인, 제자들과의 생활을 기술하면서 12수의 시를 읊습니다.따라서 이러한 자연의

묘사는 시가(時歌)의 모티브로서 오래 전부터 관용되었으나, 1곡에서 9곡까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자연모사

방법은 구곡도(九曲圖) 또는 구곡가(九曲歌)라는 특수한 산수화와 묘사시의 장르를 이루게 됩니다.

 
조선왕조는 건국과 더블어 그 국가이념을 주자의 성리학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구곡도의 형식은 주자의 철학과 함께 자연스럽게

유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에서의 구곡도(九曲圖-時)의 연원은 선초 안평대군의 무이정사에서 찾고, 퇴계(退溪)의 무이구곡도와

율곡(栗谷)의 고산구곡도에 이르러 정착되며,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1635~1705)의 곡운구곡(谷雲九曲)에 맥통 된다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곡궁 김수증이란 분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곡운선생은 목민자요 성리학자이며 운둔선비로 세상의 시비를 꺼리고 산수를 완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품의 소유자이다. 45세 때인

현종 9년에 춘천을 거쳐 평강현감으로 부임도중 일찍이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렀던 화학산 북록이 절경이라는 소문을 듣고 이듬해인 현종

11년에 이곳 영당동으로 들어와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 따서 농수정사를 짓고 구곡을 경영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난세를 피해 경관이 수려한 곳에 운둔하며 학문에 정진하면서 경영한 구곡에는 황해도 해주에 있는 이이의 고산구곡,

충북 괴산에 있는 우암의 화양구곡을 비롯한 삼척의 무릉구곡, 춘천의 이산구곡, 가평의 옥계구곡 등이 대표적인 구곡이다. 이러한 구곡들이 수

려한 경관 때문에 현대에 이르러서는 유명관광지로 각광을 받고는 있지만 당시의 선비들이 시로 표현한 내용에는 관심들이 없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화천의 곡운구곡은 조세걸(1635~1705)이 그린 실경산수화인 곡운구곡도를 참고해서 1곡 방화계로부터 9곡 첩석대까지 찾았으나 이미 도로건설로

또는 수해복구사업으로 인하여 상당부분 훼손되었지만 지금이라도 원형을 유지하면서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어 천만다행이다.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
곡운 김수증이 1671년 송시열에게 곡운정사기(谷雲精舍記)를 쓰게하고, 사인화가(士人畵家)인 조세걸에게는 그림을 그리게 하였는데 곡운구곡과

농수정을 포함한 실경(實景)을 열 폭 비단 위에 담채(淡彩)로 그렸다(1682년 완성).
그림이 완성된 지 10년 후 곡운 자신과 아들을 비롯하여 다섯 조카들, 외손까지 합한 아홉 사람이 곡운의 매곡(每曲)을 묘사하는 칠언절구의 시를

지어 화첩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곡운구곡도’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곡운서원의 기원 청람산 농수정사지
김수증이 화음동으로 들어가기 전에 지냈던 곳으로 후에 곡운서원으로 발전한다. 숙종1년(1675년) 김수증이 성천부사로 있던 중 동생 김수항이

송시열과 함께 유배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이 곳으로 들어가 곡운정사라는 편액을 걸고 농수정과 가묘를 세우고 산 곳이다. 농수정사지의 뒷산이

청람산이다. 이곳에 개설된 등산로를 따라 정상에 오르면 제3곡 신녀협으로부터 시작해 제9곡 첩석대가 발아래 펼쳐진다.

반수암지 법장사
김수증이 화음동에 들어와 살던 시절, 승 홍눌에게 권해 세워진 절이다.
이곳의 용중에서 나오는 감로수가 아주 좋다고 하며 풍수적으로 혈맥상통한 위치에 있다. 이곳의 승탑은승 홍눌의 사리탑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춘천부사 이덕중이 다녀간 흔적으로 입구암벽에 이름 석자가 붉게 새겨져 있다.

 

춘천에서 화천군 사내면 사창리로 가다보면 시군의 경계지점 강가에 커다란 너럭바위가 보인다. 바위에는 큰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일부는 떨어져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방화계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곳이 곡운구곡(화음구곡)의 1곡으로 곡운 김수증(1624~1701)선생의 구곡의 시작점이다.

이미 3곡 신녀협에 청은대라는 정자가 복원되었고, 이어서 농수정사 복원사업을 시작하려 한다. 복원사업이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조선시대 선비들의

운둔문화와 유기문학 그리고 생활상을 함께 이해하고 이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복원사업이 되었으면 한다

 

 

 

 

 

 

 

 

 

 

 

 

 

 

 

 

 

 

 

 

 

 

 

 

 

 화천군에서 곡운구곡을 복원하려 하는데 수백년간 이어져 오면서 수해를 입어 지형이 비뀌고 일부에는 도로나 민가가 들어서

과거의 원형대로 복구되기는 어려울것 같다. 9곡 전체의 사진을 다찍지 못해서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