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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광주·전라

[전북전주]우리시대의 위대한 작가, 최명희문학관 (03. 06)

by 柔淡 2010. 3. 10.

"혼불"이라는 작품 전체를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최명희문학관을 찾은게 약간 죄스럽게 느껴지기도 할만큼

작가는 한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가셨다.

해설사님의 안내로 돌아본 문학관은 소박 하지만 아기자기하고 작가의 치열한 작품집필 과정을 잘 알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문학관 홈페이지 소개글 인용

아무리 생애가 멀리 멀리 흘러갈지라도 자기 존재의 근원지를 떠올릴 때면 까닭도 없이 핏줄이 저린다. 작가 최명희(1947-1998).

고단한 삶의 여울, 징검다리 둥지와 같았던 전주의 집들은 지금 깡그리 사라졌지만, 최명희문학관은 생가(生家) 가까운 자리에서

작가가 살아온 기억의 마디마디를 역력히 담고 있다. 문학관은 세상을 떠난 작가가 이 세상에 다시 살러 온 집이기 때문이다.


최명희문학관은 진달래와 철쭉이 차례로 피던 2006년 봄, 그가 나고 자란 전주한옥마을에 세워졌다. 작가가 그토록 귀히 여겼던

경기전과 전동성당, 오목대와 이목대가 있는 곳이다. 아늑한 마당과 소담스런 공원이 있는 문학관은 주 전시관인 독락재(獨樂齋)와

강연장·기획전시장인 비시동락지실(非時同樂之室)로 이뤄졌다.

“독락”이란 당호는 홀로 자신과 대면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경지에서 이룩한 문학의 높은 정신을 기리는 의미다.

“비시동락”은 말 그대로 따로 때를 정하지 않고 노소동락(老少同樂), 교학상전(敎學相傳)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최명희와 전주, 문학과 전주, 문화와 전주가 만나는 자리들로 이곳은 늘 부산하다.


작가를 중심으로 구성한 전주의 문학관은, ‘내 마음의 전주에 그 옛날의 고향 하나를 오밀조밀 정답게 복원해 보고 싶’어 했던 작가의

세세한 삶의 흔적과 치열했던 문학 혼을 엿볼 수 있으며, 고향에 대한 애정까지 확인할 수 있다. 전시관에 들어서면 작가의 원고와

지인들에게 보낸 엽서·편지들을 비롯해 『혼불』이나 생전의 인터뷰·문학강연 등에서 추려낸 말들로 이뤄진 동영상과 각종 패널을 만날

수 있다. 한 줄 한 줄 눈이 따르면 곧 마음이 동한다.


최명희는 아름다운 조각품을 볼 때, 그 아름다운 조각품이 태어나기 위해 떨어져나간 돌이나 쇠의 아름답고 숭고한 희생을 우러르며

가슴 아파했고, 흐드러지게 피어 아름다운 동백꽃만큼 그 둥치에 낀 이끼의 생명력을 소중히 여겼다. 문학관 운영은 이러한 그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시민과 함께 연구하고 학습하며 감동을 주고받는 도시형·시민밀착형 문학관, 사당처럼 적막한 곳이 아니라 문학강연·토론회·

세미나·문학기행 등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서 뜀박질하는 문학 생산의 거점이며, 단순히 한 개인의 기념관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문학관, 민족혼이 춤추는 문학관으로 재현되고 있다

 

그런 작가의 고향 생가터 옆에 문학관은 소박하고 얌전하게 서 있었다. 

 후문

 

 작가의 사진들

전주는 작가의 고향이자 문학 열정을 불태웠던 곳이다. 전주 풍남동(당시 화원동)에서 태어난 작가는 풍남초등학교(1960년 졸)와 전주사범학교

병설여자중학교 (1963년 졸), 기전여자고등학교(1966년 졸)를 거친 뒤, 2년간의 공백기를 가진 다음 1968년 영생대학(현 전주대학교) 야간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여 2학년을 수료했다.
이 기간 중 작가는 모교인 기전여고에서 서무직에 종사하기도 했다. 1970년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3학년에 편입해 1972년 졸업과 동시에

기전여고에 교사로 부임하여 서울 보성여고로 옮기기까지 2년 동안 국어교사로 재직했다.

『혼불』 출간이후, 1997년 전북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 12월 11일 몹시도 차고 매운 날, 지병인 난소암으로 영면(永眠),

<전주시민의 장>으로 장례 후 모교인 전북대학교 부지 건지산 중턱에 안장됐다.

 작가의 연보

 

 

 

 언어는  정신의 지문.

 혼불 전 체 4부. 원고지 1만2천장을 한결같은 글씨로 채워 놓으신분.

 

 지인들에게 보낸 엽서

 집필실을 재현.

 

 

 최명희의 ‘혼불’은 일제강점기인 1930∼40년대 남원의 한 유서깊은 가문 ‘매안 이씨’ 문중에서 무너져가는 종가를 지키는 종부(宗婦) 3대와,

이씨 문중의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상민마을인 거멍굴 사람들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혼불’은 근대사의 격랑 속에서도 전통적 삶의 방식을 지켜나간 양반사회의 기품은 물론, 평민과 천민의 고난과 애환까지 생생하게 묘사하고,

소설의 무대를 만주로 넓혀 그곳 조선 사람들의 비극적 삶과 강탈당한 민족혼의 회복을 염원하는 모습 등을 담고 있다. 또한 호남지방의 혼례와

상례의식을 비롯해서 정월대보름 등의 전래풍속을 세밀하게 그렸고, 남원지역의 방언을 풍부하게 구사하여 민속학ㆍ국어학ㆍ역사학ㆍ판소리

분야 학자들의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혼불은 문학평론가들부터 입이 마르도록 찬사를 받았다. ‘전통적인 소재, 유교적인 이데올로기, 지역 민속지적기록, 그리고 가문사 등이 어울린

민족학적 서사물, 또는 자연 서사물’, ‘찬란하도록 아름다운 소설’, ‘일제 식민지의 외래문화를 거부하는 토착적인 서민생활 풍속사를 정확하고

아름답게 형상화한 작품’이라면서 1990년대 한국문학사 최고의 걸작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1947년 10월 전주시 경원동에서 2남4녀중 장녀로 태어나 전주풍남초등학교와 전주사범학교 병설중학교, 기전여자고등학교,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쓴 수필 ‘우체부’가 당시 고등학교 작문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문재가 뛰어났던 최명희는 전북대

재학시절에도 전북대신문에 수많은 문학작품을 발표했다.

대학 졸업 후 모교인 기전여고와 서울 보성여고에 교직생활을 했으나,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쓰러지는 빛’이 당선되어 등단하고,

1981년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전에서 ‘혼불’ 제1부가 당선되자 집필에 전념하기 위해 사직했다.

이후 17년 동안 1만2,000장 분량의 혼불 5부를 1996년 12월 완간하자, 모교인 전북대에서는 1997년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제11회

단재문학상(1997)과 호암상 예술상(1998) 등을 수상했다. 이후 난소암이라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혼불 제6부 제7부 집필의욕을 불태웠으나

안타깝게도 5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혼불은 150만부가 팔릴 정도로 인기였으나 2006년 유족의 요구로 절판된 상태다. 서점에서는 물론 도서관에서도 혼불을 만나기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길 4년째, 최근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유족들이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올 3월 안에 재출간할 예정이라고 하니 참으로 반갑기 그지없다.

/정상권 객원논설위원

 지인들이 최명희 작가를 생각하며 적은글

그중 고려대 교수이자 영문학자인 서지문씨가 평해놓은 글이 가장 인상적이어서 인용해 본다.

 

삶이 기도였던 작가 최명희 -서지문(고려대 교수)

대하소설 ‘혼불’을 처음 읽었을 때, 이 작품은 전편이 작가의 기도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인 소원을 비는 기도문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해원과 평안과 유구한 장래를 비는 간절한 장편의 기도문이라고. 그리고 그 작품은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서 쓴 정도가 아니라 생명의 진액을

짜내어서 쓴, 殺身供養(살신공양)과도 같은 작업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독자로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집필을 해서 그토록 큰 감동과 희열을

제공해준 작가에게 감사와 치하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작가에게 감사하기를 잊고 사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현실에서 물질적인 도움을 준 사람에게는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확대시켜 주고, 삶의 의미와 소중함을 일깨워준 작가의 무한한 은혜는 예사롭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작가 최명희는 ‘혼불’이라는 소설을 통해 우리 겨레의 혼을 되살리는 너무도 막중한 작업을 시작해 놓고, 갚을 길도 없는 큰 빚을 지고 도망다니는

사람처럼 항상 불안하고 외로웠다고 한다. 가혹하고 슬픈 삶을 살다간 영혼들의 쓰라린 혼불이 너무도 간절하게 타오르고 있어서 그들의 하수인이

되어 그들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가라는 대로 내달렸다고 한다. 그리고 최명희는 ‘근원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득한 선조로부터 오늘의 우리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우리나라의 기후와 풍토·산천초목·생활습관·사회제도·촌락구조·역사·세시풍속·관혼상제·통과의례, 그리고 주거의 형태와 복장과

음식이며 가구·그릇·치레·소리·노래·언어·빛깔·몸짓들을 그저 토막지식으로서가 아니라 그것들을 행하고 치르고 감당했던 선조들의 숨결과 손길과

염원과 애증이 선연히 살아나도록 애절하게 재생해냈다.

그 무한한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작가를 만나본 후 친구가 되었는데, 최명희는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지극히 정성스러운 사람이었다. 흔히 예술가들은

매우 자기 중심적이고, 배려를 베풀기보다는 받는 쪽인데, 최명희는 지나치게 많은 사람에게 자신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다. 월간지에 연재를 하면서

마감날이 다가오는데 원고가 써지지 않아서 노심초사하는 중에도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으면 만나서는 전혀 자신의 초조함을 내색하지 않고 몇시간

이고 즐겁고 다정한 대화를 하곤 했다.

최명희는 자신의 50세 생일날은 자기가 사랑하고 아끼는 모든 사람들을 초대해서 자기는 음식을 대접하며 시중만 들겠다고 자주 말하곤 했다.

그래서 자기가 아는 아름답고 훌륭한 분들이 서로 서로 알고 사귀게 되기를 바란다고.

정말 그녀다운 생각이었는데, 그녀가 암에 걸려 투병하게 되자 그녀와 ‘혼불’을 사랑하는 각계 각층의 유명·무명 인사들이 함께 모였다. “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 결성식에서 최명희는 자신을 그 자리에 모인 보석같이 귀한 분들을 아름다운 목걸이로 꿰는 보잘것없는 ‘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녀가 기라성같은 명사들이 세팅을 이루는 보석의 중심 다이아몬드였다.

최명희는 암과 싸우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암은 매우 반갑지 않은 손님이지만 나를 찾아온 손님이기 때문에 극진히 대접해서 섭섭지 않게 떠나보내야

한다고. 그래서 그녀는 지옥의 고문보다 더 무시무시한 항암제 치료의 과정을 불평도 하지 않고 고스란히 순하게 견디다가 갔다.

단군신화의 속의 웅녀는 최명희에게 크나큰 영감이요 위로였다. 쓰디쓴 쑥과 아린 마늘을 먹으면서 1백일동안 굴 속의 암흑을 견디는 시험을 이기고 사람이

된 곰 할머니의 신화에서 그녀는 우리 민족의 표상을 보았다. 그 고독·절망·눈물을 극복한 웅녀의 인내력이 우리의 유전 형질에 전해 내려오고 있으리라고

믿었다.

최명희는 아름다운 조각품을 볼 때, 그 아름다운 조각품이 태어나기 위해 떨어져나간 돌이나 쇠의 아름답고 숭고한 희생을 우러르며 가슴아파했고, 흐드러지게

피어 아름다운 동백꽃만큼 그 둥치에 낀 이끼의 생명력을 소중히 여겼다. 그녀의 언어 구사는 구구절절이 모국어의 혼에 대한 경배요, 애절한 사랑의 고백이다.

그녀가 재생해낸 순결한 모국어는 우리 민족 정신의 指紋(지문), 겨레의 넋이 찍힌 무늬, 그리고 민족혼을 담는 그릇이다.

이토록 나라가 어수선하며 국민의 심성이 피폐하고 황량해진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하고 요란한 ‘제2건국운동’이 아니고 우리에게 순결한 심성과

삶에 대한 지극함을 되찾아주는 사람과 책이 아닐까 한다.

 

 

 

 

 

 문학관옆에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있다. 아직 개장은 하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