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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제주

[제주한경] 제주올레 12코스의 명소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

by 柔淡 2010. 5. 18.

수월봉과 엉알길을 걸어보고 사진도 찍은 후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12코스의 마지막인 절부암과 성 김대건신부 제주표착 기념관이다.

돌팔이 천주교 신자인 우리부부가 올해 여기저기 팸투어를 다니다 보니 지난 4월에는 김대건신부가 사제서품을 받고 처음 도착한

익산에 있는 나바위성지를 다녀왔고, 이번 제주 팸투어에서는 용수리 김대건 신부 표착기념관도 와보게 된것이다.

지난주에는 서산 해미읍성의 천주교 성지에도 다녀왔으니 이제 성당에 열심히 다니라는 천주님의 뜻인 모양이다.

 

수월봉과 엉알길을 돌아보고 당산봉을 건너띈후 도착한 한경면 용수리 해안 아름다운 곳이 김대건 신부님이 사제서품을 받고

우리나라에 처음 표착하신 곳이다.

 

김대건 신부 일대기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는 충청도의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시골에서 낮은

관직을 얻었던 그는 두 차례의  체포와 석방을 겪었고, 1805년에 다시 체포되어 1814년에 충청도 해미에서 옥사 순교하였으며,

1816년에는 종조부인 김종한(안드레아)마저 대구에서 참수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부친 김제준(이냐시오)은 이후에도 얼마동안

고향인 충청도 솔뫼(현 충남 당진군 송산면 우강리)에서 거주하였으나, 다시 박해의 위험이 닥치게 되자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을

거쳐 경기도 용인의 산중으로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영위하였다.

  김대건 신부가 어린 시절을 보낸 용인의 골배마실(현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남곡리)과 이웃의 한덕골(용인시 이동면 묵리의 굴암)은

일찍부터 비밀 신앙 공동체인 교우촌으로 형성된 마을이었으므로 신앙생활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환경을 갖고 있었다. 아우인 난식

(프란치스코)과 함께 집안의 신앙과 순교 전통을 먹고 자란 김대건 소년은 점차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하느님의 종으로 성장하였고,

이때부터 순교의 영광에 대한 믿음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잡아가기 시작하였다.

 

1845년 상해에서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는 서울에서 잠시 사목한 뒤, 모친이 거주하던 용인으로 내려가

그 일대의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신자들을 돌보았다. 모든 활동은, 신자들을 찾아다니는 박해자들과 배교자, 밀고자들의 눈길을 피하며

비밀리에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

  교우촌에 방문하여도 오래 머무를 수 없었고, 미사를 드릴 시간도 없었다. 밤중에 교우촌을 찾아다녀야 하고 교우촌에 당도하면 복사를

시켜 교우들을 모은 다음, 벽에 고상을 걸고 성사를 준 뒤 곧바로 다른 교우촌으로 가야 했다. 교우들은 신부님을 전송할 수도 없었고 집안

에서 무사하기만을 빌었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성사를 받은 교우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고, 김대건 신부 또한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순방을 계속하였다.

 

1846년 6월,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동료 선교사들의 비밀 입국 통로를 알아보기 위해 백령도 부근을 돌아보던 김대건 신부는 순위도 등산진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조정 대신들의 요구에 의해 옥중에서 영국의 세계지도 한 장을 번역하였고, 두 장의 세계지도를 만들었으며, 지리 개설서를 편찬

하기도 하였다. 그의 서양 문물에 대한 지식과 재능은 임금의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고, 따라서 온갖 회유를 받았다. 그러나 이에 굽히지 않자 40여

차례의 심한 문초와 형벌 끝에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았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김대건은 26세의 나이로 참수되어 천상 영광을 안았다. 이때 마지막 남긴 말은 이러하다.

  “저는 주님을 위해 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생명이 저에게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천주교를 신봉하십시오.”

 

김대건 신부는 21통의 서한과 1통의 순교 보고서, 2통의 작문, 1편의 조선전도 등 25건의 문서를 남겼다. 이 밖에도 3통의 서한이 있었다고 하나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21통의 서한 중 마지막의 한글 서한은 <조선 교우들 보아라>라는 ‘회유문’이고, 한문 서한(1844년 12월)과

라틴어 서한(1846년 8월 26일자의 옥중 서한)은 현재 프랑스어 번역본만 남아 있다.

‘회유문’ <조선 교우들 보아라>는 조선 교우들에게 교리를 충실히 따르도록 부탁하면서 석별의 정을 나누고자 한 것으로, 이를 통해 조선 교우들에

대한 김대건 신부의 지극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용수리 바닷기 전경. 멀리 차귀도가 보인다.

 

 

 

 

 기념관안에는 김대건 신부님의 모든것을 알수 잇는 연표, 기념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라파엘호

라파엘 호는 김대건 신부가 1845년 4월 30일 제물포를 떠나 상해로 갈 때 타고 갔다가, 8월 31일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11명의 교우 등과 함께 상해를 출발하여 조선으로 입국할 때 타고 왔던 배의 이름이다. 조선의 일반 목선을 타고 상해를 떠나면서, ‘토비아의

길을 인도하였다’는 여행자들의 주보 라파엘 대천사의 이름을 따서 배의 이름을 지었다.

1845년 1월부터 4월까지 서울 돌우물골(石井洞)에 거처하였던 김대건 부제는, 이 땅에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해 교우들과 함께 배를 구입하여

제물포를 떠나 상해로 가게 되었다. 김대건 부제 일행은 출항 하루 만에 큰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게 되었으나, 깊은 신심으로 난관을 극복하고

5월 28일 마침내 중국의 오송항에 도착하였다. 그런 다음 상해로 가서 페레올 주교에게 8월 17일 사제 서품을 받은 후, 8월 31일 조선으로 출발

하였다. 라파엘 호는 풍랑에 표류하게 되어, 상해를 떠난 지 28일 만인 9월 28일에 제주도 해안에 표착하였다. 배를 정비한 일행은 다시 북상하여

10월 12일에 전북 익산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김대건 신부가 라파엘 호와 생사를 함께한 기간은 5개월 12일이나 되었다.

 

 

 

 

 

 

 

 

 용수리해안

 

 

 성당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