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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충남부여] 우리나라 석탑의 시조, 국보9호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

by 柔淡 2010. 5. 20.

부여 청소년수련원바로아래에 정림사지주차장이 있다. 주차장에서 100m쯤 걸어 내려가면 정림사지 정문이 보이는데

가장 눈에 띄는것이 정림사지5층석탑이다.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 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석탑은 익산(益山)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石塔)과 함께 백제시대(百濟時代)에 세워진 귀중한 탑으로, 우리나라 석탑의 시조(始祖)라고

할 수 있다.

목조건물의 가구(架構)를 모방하고 있으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정돈된 형태에서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의 형태가

장중하고 명쾌한 기풍을 풍겨준다. 초층탑신(初層塔身) 4면에는 당(唐)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百濟)를 멸한 다음 그 기공문(紀功文)을 새겨

넣었으나 이는 탑이 건립된 훨씬 뒤의 일이다.
이곳 일대의 발굴조사에서 정림사명(定林寺銘)이 들어 있는 기와가 많이 출토되었다.

 

 이탑의 좌측 모서리부분에서 사진을 찍을때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고 한다.

 각층별로 비례되는 덮개석. 끝부분이 약간식 올라간 모양이 정교하다. 거의 1600여년 전에 돌을 저렇게 정교하게 다듬을수 있다니...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탑에 새겨놓은 글의 흔적을 설명하는 차선미 문화해설사

 1500년전의 글이 아직도 선명하다.

 1층덮개석이 깨진흔적은 일제가 이탑을 해체해보려고 하던중 제일위의 옥개석을 떨어트려 저렇게 되었다고 한다.

올해가 경술국치 100년. 다시한번 그들의 만행을 기억해야 할 시점이다.

 

 탑에는 그을린 흔적이 많은데 이는 서기660년 백제멸망당시 나당연합군에 의해 부여가 쑥대밭이 되었고 무려1주일간 도시가 불탓다는

기록이 있는것으로 보아 그때당시 정림사의 건물이 불타면서 그을린 흔적으로 판단된다고 한다. 

 정림사의 금당과 탑. 금당과 탑이 정확하게 중앙으로 일치하지는 않는다.

 

 탑에서 입구쪽을 바라본 풍경

 

정림사지 금당안에는 보물 제 108호 부여정림사지석불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충청남도 부여의 정림사지에 남아 있는 석조불상으로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제9호)와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정림사는 6세기 중엽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로 고려시대에 다시 번창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석불상은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인다.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몸집을 보여준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쥔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8각으로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상대는 연꽃이 활작 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모양을 새겼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했다.

현재 불상이 자리잡고 있는 위치가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로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된다.

 

 머리부분은 민가에서 절구나 맷돌로 쓰던것을 시멘트로 막고 올려놓은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불상의 몸체에 비해 좌대는 아주 정교하게 조각되어있다.

 

 우리나라의 역사상 여러개의 국가가 있었는데 그중 남한에 있는 신라와 고려, 조선시대의 유적들은 비교적 잘 정비되고 보존되고 있는데 비해

백제시대의 유물과 유적은 아직도 정비되지 않은게 많은것 같다.

 

20여년전 계룡대에 살면서 부여를 자주 지나다녔는데 그때는 이곳이 정비되지 않고 그냥 방치되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서야 어느정도 정비되어 가고 있는 정림사지를 보니 조금 안심이 되는데 확실한 고증을 거쳐 완벽하게 복원되었으면 좋겠다.

 정림사지 입구

 

 앞으로 이렇게 복언하겠다는 조감도다.

 아직도 슬슬한 정림사지

 

 

 

 

  탑 바로앞의 연못에는 수련이 막 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