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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충남서산]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마음을 여는절, 상왕산 개심사

by 柔淡 2010. 5. 26.

앞서 올린 글에서 개심사에 들어오고 나가는 아름다운 소나무 숲길을 볼수있었는데 우리나라의 이름난 사찰중 이렇게

자연 그대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사찰들이 이제는 매우 드물어 졌다.

 

10여년전만 해도 영광의 불갑사나 용천사, 강진의 무위사 등은 옛정취가 그대로 남아있는 아름다운 절집이었는데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하자 각종 불사를 일으켜서 일주문부터 대웅전의 단청가지 삐까뻔쩍하게 꾸미기 시작했는데

예부터 내려오던 전통있는 건물과 새로지은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못생긴 아가씨가 얼굴전체의 조화는

생각지도 않고 성형수술로 예쁜 입과 코, 눈을 만들어 아무렇게나 붙여놓은 꼴이 되었다.   

 

그런데 마음을 여는절 개심사는 옛것이 나름대로 잘보존되고 주변의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어서

이 절집에 들어오는 순간 정말 마음을 열고 싶었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하루종일 절집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내마음을 다 열어보이고 싶은 곳이었다. 

 

운산면 소재지에서 647번 지방도로를 따라 신창리 방면으로 약 2km정도 가면 고창동 마을에서 동쪽으로 신창저수지를 지나 3km정도에

위치한다. 개심사에 대한 연대와 연혁은 남아 있지 않다. 절의 기록에 의하면 개심사는 백제 의자왕 14년 갑인년(654)에 혜감국사가 창건

하였으며 그 후 고려 충정왕 2년(1350)에 처능대사에 의하여 중수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현재의 대웅전 목조건축의 연대에 대해서는 1941년에 해체공사를 실시하였을 때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여 성종 15년(1484)에 중창된 건물

임이 판명되었다.
개심사는 북쪽에 있는 상왕산과 남쪽에 있는 가야산을 연결하는 산록맥의 서쪽 산록에 위치하고 있다. 산중턱을 몇 단에 걸쳐 깎아서 조성된

부지는 서남쪽을 향하고 있다. 자연석으로 다듬어진 계단을 올라가면 사찰 전면에 안양루가 있는데 대웅전으로 가기 위해서는 안양루 남쪽

측면 옆에 가설된 협문을 이용해야 한다. 안양루는 우리나라 산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류형식을 따르지 않았으며 단층으로 세워진 종루

건물이다. 경내의 마당을 중심으로 대웅전과 안양루가 동서로 위치해 있고 남북으로는 무량수전과 심검당이 위치해 있다.

굽은 나무를 그대로 사용한점, 오르는 길에 규격화된 돌계단을 시설하지 않은 점등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었다.
또한 이곳에는 명부전을 비롯한 아미타삼존불, 관경변상도, 칠성탱와, 제석,천룡도, 오층석탑, 청동은입사향완, 20가지 목판경전 등 많은

문화재급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입구에서 본 전경. 저 차들이 없었으면 정말 아름다울텐데.....

 범종루

 종각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 예사롭지 않다.

심검당을 받치고 있는 기둥처럼 구부러진 그대로를 사용했다.

 상왕산개심사 현판.

근세의 유명한 서화가 해강 김규진의 글씨인데 이 사찰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크게 썼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는 여기뿐만 아니라 가야산해인사, 금강산 건봉사 등 유명사찰의 현판도 썼다고 한다.

이현판은 안양루의 뒤쪽에 달려있다.

 해탈문을 통해야 절집으로 들어갈수 있다.

 부처님오신날 바로 전 주말이라 연등이 화려하다.

  개심사의 본전인 현재 대웅전 건물의 건축년대는 성종실록 56권의 기록에 의하면 성종6년(1475) 충청도 절도사 김서형이 사냥을 나왔다가

산불을 내 개심사가 연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14년에 대웅전 해체 보수 당시에 마루도리 받침 장혀속에서 '조선 성종조 성화 이십년

갑진 6월 대웅전중창'이란 묵서명이 발견되어 현재의 대웅전은 성종 6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9년이 지난 성종 15년(1484)에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웅전의 건축양식을 살펴보면 창건당시에 축조된 것으로 전해지는 높은 화강석 기단 위에 남향하여 다포계와 주심포계를 절충한 단층 겹처마

맛배지붕집이며 측면에 풍판을 달았다. 특히 양편 끝기둥을 귀솟음과 안쏠림 수법을 강하게 나타냄으로써 착시현상의 교정이 잘 이루어진 건물이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면적은 88m²(27평)이다.
가구는 2고주 9량이며 건물의 앞뒷면 상부에만 다포계의 공포를 바깥쪽에 2출목, 내부쪽에 3출목으로 짜 올렸고 측면에는 공포가 없다.

특이한 점은 전형적인 조선초기의 다포계 건물이면서도 마루 대공과 중도리를 떠받치고 있는 합장(合掌)은 주심포계 가구방식을 사용한 점이다.

 

충청절도사가 사냥을 나왔다가 불을 내서 백제시대부터 내려오던 사찰을 태워 먹었으니 요즈음으로 말하면

도지사가 실화를 한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공직자들은 어쩔수 없나보다. 그런데 그게 실록에 기록되어 있으니 자손 만대로 창피한 일일것이다. 

 무량수각

 

 대웅전 안의 불상

 안양루.

영주 부석사에도 안양루가 있는데 그곳과는 달리 단층건물이다.

 

 이 5층석탑도 연륜이 쌓인 탑인것 같은데 설명이 없고 문화재로 지정되지도 않았다.

 심검당

 개심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이다. 단청도 없고 구부러진 나무를 그대로 사용했다. 

보물 제143호 개심사 대웅전을 바라보고 좌측(서편)에 건립된 심검당은 그 건축 년대를 기록한 문헌이 없어 정확한 년대를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성종실록에 성종 6년(1475) 6월에 충청도 절도사 김서형이 가야산에 사냥을 나왔다가 산불을 내어 개심사의 건물이 화재로

전소된 것을 성종15년(1484)에 대웅전을 비롯 건물을 중창했다는 기록과 1914년도에 대웅전 건물을 해체 보수당시 마루도리 속에서

조선 성종 15년(1484)에 중창했다는 묵서명이 발견되어 심검당 건물도 이때 같이 중창된 것으로 추정된다.

 

심검당의 건축양식을 살펴보면 화강석재를 견치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주두(柱頭) 위에

공포(供包)를 짜올린 주심포계(柱心包系) 양식이며 가구는 5량집이다.
초제공 밑 주두 아래로 운각(芸閣)을 한 보아지 형식으로 되어 있어 익공계와도 비슷한 점이 있다. 초제공과 2제공 뿌리는 앙설로 되어있고

3제공만이 초각되었다. 심검당의 평면배치는 정면3칸, 측면3칸이며 건물의 좌측에 정면 3칸 측면 5칸의 덧집을 달았다.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 집이다. 건물 총면적 : 111.4m2(심검당 63.2m2 , 덧집 48.2m2)

 

 매스컴에도 오르내리는 개심사의 청벚꽃

 함석지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요연선원.

일엽스님이 비구니들을 정진케한 유서깊은곳이다.

명부전 

개심사 대웅전을 바라보고 우측에 건립된 조선시대의 목조 건물로 개심사에서 대웅전 다음으로 중요한 건물이다.
이 건물의 건립연대는 조선 고종 26년(1889)에 죽포 김설제(竹圃 金設濟)가 작성한 개심사 중창 수리기의 내용에 '순치삼년명부전신설' 이란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인조 24년(1646)에 신축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건물의 기단은 다듬은 돌로 가지런히 쌓았고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원주를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평면에 단층, 익공계 겹처마 맞배지붕 집이다.
건물 내부의 가구는 무고주 5량으로 내부에 기둥을 세우지 않아 공간이 넓은 편이며 천정은 연등천정으로 평주에 걸친 대들보 위에 익공형 화반

(花盤)을 얹고 화반 위에 장혀와 중도리를 놓은 다음 충도의 사이에 종량을 걸치고 그 가운데 키가 큰 화반을 놓아 마루도리를 받치게 하였다.
지장십왕상을 모신 불단은 ∩형이며 출입문 좌우에 사자상을 세워 명부전을 완성하였다

 

 

 

 명부전 지붕

 배롱나무도 수령이 꽤 오래돼 보인다.

 

 

 개심사는 우리나라최고의 목조건물이 있으며 옛절집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안동의 봉정사와 함께

마음 깊숙히 새겨두고 자주 와보고 싶은 절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