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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대전·세종·충청

[충남서산] 이순신 장군이 1년동안 근무하셨던 해미읍성 관아

by 柔淡 2010. 5. 26.

해미읍성은 상당히 넓은 편인데 성내에 민가는 없고 성안의 북쪽부분에 관아 여러채가 복원되어있다.

 

해미읍성은 해미면 읍내리에 위치해 있으며 성곽길이 1,800m, 높이 5m, 면적 60,000여 평으로 조선조 초기의 대표적인 석성으로

1963년에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이 성은 충청병마절도사영으로 조선조 태종 18년부터 세종 2년(1420)까지 3년간에 걸쳐 전국각지의

인력을 차출하여 쌓았으며 성종 22년(1491)에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 성 안에 근무인원은 850여명이나 되는 대부대였으며 충청도의 병권의 지휘소로써 국방은 물론 내란 방지 포호(捕虎)등의

임무도 맡고 있었다. 따라서 이후부터 왜구의 서해안 침입이 현격하게 줄어서 큰 효과를 보았으나 효종 2년(1651)에 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가서 230여년 만에 절도사영으로서의 역할을 끝나고 읍성의 역할이 시작된다.
그 후 이성에는 호서좌영(湖西左營)을 설치하고 무장이 현감인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어 현감의 임무와 내포지방 12개 군현의

병권을 겸하여 관장하였으며 이순신 장군도 이 성에서 선조 12년(1578)에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로 10개월간 근무한 적이 있다.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읍성으로는 가장 잘 남아 있어 대표적인 표본이 된다. 읍성의 남문은 진남루(鎭南樓), 동문은 잠양루(岑陽縷)라

하였고, 서문은 지성루(枳城樓)라 하며, 북문은 암문형식으로 문루가 없다. 서문의 남측에 인접하여 수구가 성벽 아래로 암거(暗渠)형식으로

마련되었다.
해자는 성벽에서 8m쯤 간격을 두고 윗너비가 10~11m, 아랫너비 5m, 깊이 1.4~2.4m의 규모로 북벽 쪽에 일부 남아 있다. 남문의 서측으로는

2개의 적대를 가진 치성(雉城)이 길이 7.9~7.7m, 너비 7.5~7.6m의 규모로 만들어졌다.

이 읍성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아사(衙舍) 및 작청(作廳) 등의 건물들이 뺴곡이 있었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외곽석장기지(官衙外廓石牆基地)가 발견되었다
성은 해발 130m의 구릉을 포함한 평지에 마련되고, 성벽은 조선 초기의 전형적인 축조 방법을 보여주는 하대상소(下大上小)의 성석 사용과

쐐기돌을 많이 끼운 수법을 볼 수 있으며 안쪽은 흙으로 내탁되었다.
성(城)의 둘레에 탱자나무를 돌려 심었으므로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다고 한다.

호서좌영은 이 성에서 행정구역이 개편되는 1914년까지 250여 년간 지속되었 호서좌영이 폐지되면서 면사무소 초등학교 등 기관, 주택이

있었으나 1970년부터 철거하였고 현재는 정비사업이 한창 진행중이다.

 

오래된 느티나무가 읍성의 역사를 말해준다. 

 

 

 

 동헌

부속사와 책실

  

 동헌의 정문

 우물

 

 

 해미현감의 관사

 

 

 

 

 

 호서좌영

 객사